1948년 9월 5일 육군사관학교(육사)가 개교했다. 46년 5월 1일 개교한 조선경비사관학교(경비교)가 육사로 개칭과 동시에 새 출발한 것인데, 경비교는 현대 한국군 최초의 교육기관인 군사영어학교가 46년 4월 30일 폐교한 후 다음 날 장차 정규 사관학교로 발돋움할 비전을 갖고 문을 연 군사학교였다.
경비교는 6월 15일 1기생 40명이 소위로 임관한 이래 육사로 개칭하기 직전인 48년 7월 28일 임관한 제6기생 외에 제1차 참모학생, 제1기 군의후보생, 제1기 법무후보생 등에 이르기까지 총 1305명의 졸업자를 배출했다. 고급하사관 출신이 주축이 된 1기의 교육 기간은 45일이었고, 2기부터는 3개월간 교육을 실시했다.
육사로 개칭한 후 졸업생은 제7기를 비롯해 전쟁으로 50년 7월 8일 폐교하기까지 7기 특별반과 7기 후반, 8기, 8기 특별 1∼4반, 배속장교 1∼3기, 9기, 그리고 10기(생도1기)와 생도 2기가 있었다. 교육 기간은 7기가 4개월, 8기부터는 6개월, 10기는 1년, 나머지 특별반과 후반은 3∼5주였다. 생도 1기가 50년 7월 7일 대전에서 임관했는데, 이로써 육사는 4150명의 장교를 배출했다.
생도 2기는 4년제로 입학했지만, 입교 24일 만에 학교가 폐교하자 육군종합학교 1·2기에 편입됐다. 그 후 51년 10월 30일 육사는 진해에서 4년제로 다시 개교해 54년 6월 23일 현 태릉으로 복귀했으며, 57년 3월 16일 화랑의 얼·정신을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화랑대’라 했다.해안경비대의 장교 양성은 조선해안경비대사관학교(해안경비교)의 전신인 진해특설기지에 설치된 해군병학교에서 시작됐다.
해군병학교는 46년 1월 17일 설립돼 그해 6월 15일 해안경비교로 개칭했다. 2월 8일 사관학교 제1기생으로 103명이 입교, 1년간의 교육을 마치고 47년 2월 17일 61명이 임관했다. 전쟁 직전까지 48년 12월 15일 2기생 48명과 50년 2월 25일 3기생 54명이 졸업했다. 처음에는 1년씩 교육받았으나 2기부터 1년 10개월, 3기부터는 2년 6개월에 걸친 교육을 받았다.
해안경비교는 해안경비대학, 해사대학 등으로 부르다 49년 1월 15일 해군사관학교(해사)로 개칭했다. 해사에서는 50년 2월 25일에 3기생 54명이 2년 6개월 만에 첫 졸업생으로 임관했다. 6·25전쟁 직전, 정부수립 이후에 입교한 4∼7기생들로 구성된 해사전투사령부를 세워 학교방어를 담당했다. 교육 기간은 4기부터 3년으로 정해졌고, 대체로 100명 내외의 입교생 중에서 4기 71명, 5기 73명, 6기 80명, 7기 88명이 졸업했다.
공군사관학교는 육군항공사관학교를 모체로 창설됐는데, 3군 중 가장 뒤늦게 생겼다. 49년 10월 1일 육군에서 공군이 독립한 것처럼 공군사관학교 역시 같은 날 육군항공사관학교가 개칭된 것이다. 육군항공사관학교는 김포비행장에서 2월 15일 개교해 항공 유경험자를 대상으로 1개월의 교육훈련 후 49년 4월 15일 46명을 임관시킨 바 있다.
이후 정규 공군사관후보생(공사) 1기로 49년 6월 15일 97명이 입교해 2년간 교육을 받았는데, 이들은 전쟁으로 대구·진해·서울·제주도(모슬포)·사천 등에서 교육을 받고 51년 8월 5일 83명이 진해본부에서 임관했다. 공사는 58년 12월 19일 대방동으로 이전했고, 66년 박정희 대통령은 ‘성무대’라는 별칭을 하사했다.이렇듯 각군 사관학교는 조선경비대 시기에 출발해 국군 개편 과정을 거치면서 정규화·체계화를 통해 정규 사관학교로 성장한 것이다.
<백기인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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