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초기 이승만 대통령은 왜 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유엔군사령관에게 이양했을까? 이대통령이 이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은 상태에서 이의 정확한 이유를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당시 한국을 둘러싸고 벌어진 국제상황, 특히 유엔의 행보와 한국의 입장을 면밀히 살펴보면 이대통령이 ‘그렇게 했던 이유’를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이승만은 미국 명문 프린스턴 대학(박사과정)에서 국제정치학을 전공한 학자로서 국제정세의 흐름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을 갖고 있었다.
그는 일본의 진주만 기습이 있던 해인 1941년 여름 ‘일본내막기(Japan Inside Out)’를 영문으로 출판해 일본의 침략근성을 미국 조야(朝野)에 알려 경각심을 줬고, 5개월 후에 실제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그는 일약 유명인사가 됐다.
6·25전쟁 때 그의 이런 능력은 전쟁을 거치며 하나씩 입증됐다.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북한의 기습남침을 확인한 후 절박한 위기 속에서도 이를 ‘한반도를 통일할 절호의 기회’로 여기고 행동했다. 그는 이를 위해 미국과 유엔에 매달렸다. 그는 무초 대사를 통해 그의 뜻을 워싱턴에 전달했고, 국군에게 필요한 탄약·무기지원을 지원받을 수 있도록 조치했다.
또 주미대사(장면)를 통해 백악관과 국무부에 한국의 입장을 설득해 유엔을 통한 신속한 지원이 이뤄지도록 외교적 노력을 강구했다. 국제정치학자로서 뛰어난 판단력을 갖고 있던 이대통령의 대미·대유엔 외교 노력은 미국의 지원하에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 한국에 대한 신속한 군사지원 결의로 나타났다. 또 그 연장선상에서 유엔안보리는 한국에 파견될 유엔회원국 군대를 지휘할 유엔군사령부 설치를 결의했다. 유엔의 위임을 받은 미국은 7월 8일 유엔군사령관에 맥아더 원수를 임명했다.
이대통령의 뛰어난 국제감각과 기지는 이때부터 그 빛을 발했다. 그는 유엔회원국이 아닌 한국을 유엔의 일원이 되게 함과 동시에 국군을 유엔군의 일원으로 만드는 일석이조(一石二鳥)의 단안을 내렸다. 그것이 바로 국군 작전지휘권을 유엔군사령관에게 넘기는 것이었다.
한국은 48년 12월 유엔총회에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받았으나, 유엔회원국 가입신청(49년)은 소련의 거부권 행사로 무산돼 6·25 때 한국은 유엔회원국이 아니었다. 이를 잘 알고 있던 이대통령은 한국에서 유엔지상군 부대를 통합지휘하게 될 미8군사령부가 대구로 이동한 다음날(7월 14일) 무초 대사를 통해 유엔군사령관에게 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이양하는 서한을 보냈다. 그는 “현재의 적대행위가 계속되는 동안 한국 육·해·공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유엔군사령관에게 위임한다”고 밝혔다.
7월 17일 맥아더 장군은 미8군사령관에게 한국군에 대한 지휘권 행사를 지시했고, 7월 18일 맥아더는 무초 대사를 통해 이승만에게 “한국군의 작전지휘권 이양에 관한 대통령의 결정을 영광으로 생각하며, 유엔군의 최종 승리를 확신한다”고 답했다. 이대통령과 맥아더의 서신은 7월 25일 유엔사무총장을 경유, 유엔안보리에 제출돼 유엔의 공식승인을 받게 됐다.
이렇듯 이대통령의 작전지휘권 이양은 주권의 포기가 아니라 유엔회원국이 아닌 한국에 유엔국 자격을 줬고, 유엔군이 아닌 국군에게 유엔군의 일부로 싸울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함과 동시에 미국 주도의 유엔군에게 전쟁에 대한 무한 책임을 지우려는 이대통령의 심모원려(深謀遠慮)에서 나온 조치였다.
<남정옥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