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전투는 미24사단이 북한군 제105전차사단으로 증강된 보병 2개 사단에 맞서 금강 방어선 및 대전지역에서 1950년 7월 14일부터 20일까지 치른 지연전이다. 이 전투에서 미24사단은 대평리와 공주지역에 각각 연대 병력을 배치해 진지를 구축하고 북한군 2개 사단의 공격을 나흘 동안 저지하다가 대전 외곽으로 후퇴했다.
그곳에서 미24사단은 논산과 금산으로 우회 침투한 적 4사단 18연대의 배후공격을 받고 사흘 동안 고전을 치른 끝에 7월 20일 영동으로 철수했다. 이때 대전사수를 위해 대전차포로 적 전차를 파괴하며 분투하던 미24사단장 딘(William F. Dean) 소장은 뒤늦게 영동으로 가기 위해 철수 도중 길을 잘못 들은 데다 적의 매복공격을 받고 산속으로 피신했다.
고립된 산 속에서 딘 소장은 야간이동 중 발을 헛디뎌 낭떠러지로 떨어지면서 정신을 잃었다. 이 때문에 그는 일행과 헤어져 홀로 1개월간 산 속을 헤매다가 천신만고 끝에 전북 진안까지 남하했으나 도움을 청한 주민의 밀고로 북한군에 넘겨졌다. 그날은 딘 장군의 결혼기념일(8월 25일)이었다. 그는 7월 20일 대전을 떠난 지 36일 만에 진안군 상전면(현 진안읍) 운산리 마을 앞에서 밀고자에 의해 포로가 됐다.
그 뒤 딘 장군을 밀고한 주민은 54년 9월 23일 불법체포죄로 서울지방법원에서 5년형을 선고받아 복역했다. 하지만 53년 9월 4일 포로교환으로 돌아온 딘 장군이 그의 선처를 호소해 57년 5월 21일 감형돼 출소했다. 딘 장군은 밀고자 때문에 군인으로서 쌓은 명성과 전공에 치명적 타격을 입었고, 3년간 포로로 온갖 고초와 치욕을 겪었으나 그를 기꺼이 용서했다.
딘 장군은 1899년 일리노이에서 태어나 캘리포니아 대학 학군단(ROTC)을 거쳐 1923년 소위로 임관했다. 임관 후 그는 능력도 있었지만 전쟁부장관이 삼촌이었던 아내 덕으로 비교적 좋은 경력과 보직을 쌓았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장군으로 진급, 유럽전선에서 44사단장을 지냈고 전후에는 한국에서 군정장관(47년)·7사단장(48년)으로 근무하며 한국과 깊은 인연을 맺었다.
그 후 미8군 참모장을 거쳐 24사단장(49년 10월)이 됐다. 그의 지휘철학은 ‘할 수 있다(can do)’다. 그의 한국전 첫 투입 배경도 뛰어난 직무수행능력 때문이다 그는 미8군 내 사단장(4명) 중 가장 젊고(51세), 제2차 세계대전 시 유일하게 사단장을 지냈고 한국을 가장 잘 안다는 것이었다.
미24사단은 오산전투로부터 대전전투에 이르기까지 한국에 투입된 미국의 첫 지상군부대로 성공적인 지연전을 전개해 낙동강 방어선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2주 동안의 지연전을 거치며 사단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1개 사단을 장비할 무기·장비를 잃었고, 1만5965명의 병력 중 절반이 넘는 8660명의 손실을 봤다.
특히 지휘관의 손실이 컸다. 사단장 실종, 연대장 3명(전사 1·중상 1·보직해임 1), 보병 대대장 8명 중 5명(전사 2·포로 1·중상 2), 포병대대장(후송 1), 연대작전장교(포로 2) 등의 피해를 입었다. 이에 맥아더는 대전에서 미24사단의 큰 피해로 인해 7월 하순에 계획된 인천상륙작전(블루하트)을 연기했다.
하지만 미24사단이 2주 동안 보여준 지휘관의 적극적인 현장 지휘와 장병들의 감투정신 및 고귀한 피의 대가로 한미연합군은 지연전을 종식하고 미군 증원의 발판이 될 부산 교두보를 확보하게 됐다.
<남정옥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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