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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23 09:4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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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국군발달사-<25>해외 위탁교육
[군사기획] - 국군발달사
<25>해외 위탁교육
1883년 최초 유학생 박유굉 日 육사 입학

1883년 최초 유학생인 박유굉이 일본 육사에 입학해 비록 졸업 직전 비운에 죽었지만, 이후 한인 141명이 일본 육사에서 근대 군사교육을 받았다. 그들 중 일부는 대한제국군에서, 일부는 항일투쟁에서, 또 다른 일부는 광복 후 건군의 초석이 됐다.정부 수립 후 한국군의 해외 군사교육은 주로 미국에서 이뤄졌다.

주한미군 철수가 진행되면서 미군 병기가 국군에 이양되던 당시 육군은 제1·2·3훈련학교를 설치하고 미군 병기사용법을 교육시켰다. 이때 미 군사고문단은 한국군 장교의 해외유학을 적극 주선했는데, 1948년 8월 6명의 영관장교(대령 이형근, 중령 민기식·이한림·임선하·김동영·장창국)가 미 포트 베닝의 보병학교(고급과정)에 첫 입학을 했다.

그들은 10개월간 미군 병기의 전술적 운용과 분·소·중대의 전술교육을 이수하고 귀국했다. 49년 7월 19일에는 제2차 도미 유학이 있었다. 유학생으로 선발된 위관 및 영관급 장교 6명은 포트 릴리의 지상군학교에서 6개월 과정을 마치고 포트 베닝(기초과정)에 입교했다.

최덕신·최홍희 대령, 심흥선 중령, 장은산 소령, 강관용 대위, 이승호 중위 등이 그 주인공들이다. 그들은 귀국 후 모두 군사학교 체계를 세우는 데 주력했다. 심흥선 외 4명은 바로 포트 실 포병학교(고급과정)에 들어가 10개월의 고등군사반 교육을 마치고 50년 6월 귀국해 전열에 참여했다.

한편 미 군사고문단에서는 한국군 장교의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 미 육군사단의 실무교육과 견학계획을 수립해 일본에 주둔하고 있는 미 육군 제8군 예하 사단인 제1기갑사단(도쿄), 제7사단(센다이), 제25사단(오사카), 제24사단(후쿠오카) 등에 한국군 장교의 파견을 주선하기도 했다. 50년 4월 15일 제1차 실무교육단 33명이 4개반으로 1개 사단에 병과별(보병 3, 포병 1, 통신 1, 의무 1)로 균등하게 편성돼 3개월의 실무교육을 받은 것이다.

이 외에도 미 군사고문단은 일본에 설립된 미군 병무학교에 28명의 장교를 파견하는 계획을 수립했지만 전쟁 전에 승인을 받지 못했다. 당시 해외유학은 병기사용 교육과 같은 보수교육 성격을 띤 것이었다.그 후 미 국방부가 상호방위원조협정에 입각해 보·포병, 일반 참모대학에 총 27개의 한국군 유학생 쿼터를 할당했다.

이로써 지휘관 및 참모장교의 자질 향상을 위한 해외유학이 가능하게 됐는데, 51년 12월 결정된 미 보·포병학교에 250명을 파견키로 한 교육이 그것이다. 52년 3월 제1차 교육이, 그리고 이어서 제2차 교육 역시 250명을 대상으로 연차적으로 실시됐다. 주로 기술 및 행정업무를 포함한 교관 자질을 함양하는 교육을 실시했기 때문에 종래의 단순한 보수교육 차원보다 기대효과가 컸다.

해군은 52년도에 51명의 장병을 미·영·독에 파견해 참모교육 과정을 이수토록 했다. 공군도 54년 미 공군의 랙크랜드 기지에 10명의 장교를 파견해 F-86 전투기 훈련을, 그리고 55명의 장병이 항공창 정비업무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주로 조종사 교육 위주로 연차적인 계획에 의해 해외파견 교육을 실시했다. 52년 이후 해외군사학교의 유학은 육·해·공·해병대 등 전군에서 모두 실시했다. 53년부터는 그 수도 1100∼1900명 선을 오르내렸다.

해외 민간학교의 경우 해군에서 55년 2명과 56년 5명을 시작으로 59년 육군 9명과 해군 1명으로 늘어났고, 다시 60년에 육군 6명의 해외위탁생 파견이 있었다. 이 외에 특정 학술·기술분야는 국내의 일반 대학에서도 수학할 수 있었다. 국내 위탁교육은 53년부터 각군별로 실시됐다.


<백기인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국방일보-2008.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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