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1월 국방사령부에 조달보급과가 설치되면서 우리 군의 보급업무가 시작됐다. 그러나 부대 창설시 필수 장비도 지원하지 못할 정도로 보급사정은 어려웠다. 그해 7월 1일 비로소 직할 보급부대(후일 후방사령부)에서 장비·물자관리와 불출업무를 개시해 초보적인 군수지원 업무가 시행됐다.
이후 48년 국방부직제령에 따라 제3국(관리국)의 설치로 군수지원의 체계화가 추진됐다. 그러나 국방비의 한계로 여전히 열악한 보급사정은 개선되지 않았다. 군량미는 그해 11월부터 49년 10월까지 1년간 소요량을 정부 보유의 양곡에서 전량 일괄구매해 각군에 배당하고 이를 도정해 보급하도록 했다.
그러다가 6·25전쟁을 전후로 군의 보급·급식제도에 큰 변화가 있었다. 전쟁 중에는 미군의 지원물자나 군사비 일부가 한국군 부대로 직접 지원됐기 때문에 국군의 군수운용은 현재와 같은 군수관리 없이 분배관리에 치중했다. 주요 장비의 보급은 장비편성표에 의한 보충보급제도를 적용하고 물자는 청구보급제도를 적용했다. 그러나 소모 및 보급의 기준은 마련돼 있지 않았다.
한편 급식은 전쟁 전에 백미·정맥이 제공됐으나 전쟁 중엔 취사가 쉬운 백미·압맥이 보급됐다. 부식은 현지구매제도를 적용하다 53년부터는 지구급양대에서 조달했다. 56년 4월 2개월에 걸친 육군 최초의 전군 급양감사가 실시됐으며, 58년엔 한미 합동급양감시반이 월 2회 전군 부대 순회감사를 실시했다.
그리고 67년 이후엔 정부의 중농정책에 호응, 사단 단위의 영농교육대에서 자활영농을 시행했고, 대간첩작전 급식용으로 휴대용 하드빵(250g)과 오징어포(13g)가 보급됐다. 그리고 69년 1월부터는 라면이 주 1회(240g) 급식으로 실시됐다.그 무렵 육군에서 최초로 실링보급(할당보급)제도를 실시했다. 64년 전투복이 실링품목으로 채택됐는데,, 69년에 유류·의무약품을, 그 후 품목으로 확대해 70년 12개, 72년 32개 품목에 적용했다.
이때부터 실링도 물량과 자금으로 나뉘었다. 실링제도는 육군본부가 보급기준에 의거 사용부대에 대해 보급통제의 수단으로 시행한 일종의 통제보급제도였던 셈이다.또한 71년 전투식량을 각형 건빵과 육포로 조변했고, 72년 콩나물용 콩의 조변을 농협에서 일반 업자로 전환하고 식탁용 식염을 제제염 단일품목으로 조정했다. 그리고 73년 격오지부대를 위한 통조림 조변을, 74년 장유류와 두부 제조 및 필터가 부착된 화랑담배를 제공했다.
80년 이후 종래의 실링보급을 자금관리 방식으로 바꿨고 적절한 군수지원 소요 산출제원을 획득하고자 81년 2월 전군 자산 파악을 위한 재물조사계획을 수립 추진했다. 81~84년 기간에 2회에 걸쳐 총 53만4254항목에 대해 재물조사를 실시함으로써 경제적 군 운용과 한국적 군수체제 정립에 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급식은 76년부터 1식 3찬 제도를 시행하고 77년도에는 메뉴의 다양화를 위해 카레를 급식에 포함시켰다. 특히 75년 소위 ‘개발전투식량’으로 오곡밥을 개발해 11사단에서 시험급식을 한 후 이듬해부터 팀스피리트연습 간에 주식으로 활용했으며, 점차 80년대 한국 실정에 맞는 전투식량을 개발·확보했다.
82년부터 매년 주곡의 혼식비율을 조정해 백미 소비율을 증가시켰고 조식은 빵 식단으로 전환하고 차등 급식제를 도입했다. 90년대엔 우유나 육류 급식이 크게 늘었고, 2000년대에는 삼계탕·불고기 등과 같은 고급 메뉴가 등장했을 뿐만 아니라 후식으로 과일 주스가 식단에 편성되기에 이르렀다.
<백기인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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