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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19 09: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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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다시보는 6·25-<67>중공군 5월공세와 미8군의 작전지도
다시보는 6·25 - [군사기획]
<67>중공군 5월공세와 미8군의 작전지도
미3사단 하루 만에 250㎞기동 위기 극복

■ 중공군 공세

중공군은 한국전에 개입한 이후부터 휴전까지 총 일곱 차례에 걸쳐 대공세를 단행했다. 중공군은 공세 때마다 국군·유엔군에 막대한 타격을 줬다. 1차공세 때(50년 10월)는 한만국경선으로 진격하던 유엔군의 작전계획을 무산시키며 청천강선으로 밀어냈다. 이때 국군2군단 6개 연대 중 4개 연대가 재편성을 해야 될 정도로 타격을 받았고, 많은 지휘관이 실종·전사했다.

2차공세(50년 11월) 때는 전 전선에서 국군과 유엔군을 동시에 압박해 38선으로 밀어내며, 전쟁을 종결하려는 맥아더 전략을 좌절시켰다. 이때 지휘관이 전사(미8군사령관), 경질(미2사단장)되고 부대가 해체(국군2군단)되거나 피해(미1기병·미1해병사단·터키여단)를 입고 재편성됐다.

3차공세(51년 1월) 때는 서울점령 후 유엔군을 평택~삼척선까지 밀어냈다. 이때 유엔군의 한반도 철군과 망명정부 수립이 검토됐다. 4차공세(2월공세) 때는 횡성에서 국군 5사단·8사단과 네덜란드군에 엄청난 타격을 줬다. 이때 국군8사단은 연대장 전사를 비롯, 8000명이 손실되고, 화포·장비 대부분을 잃었다.

5차공세(51년 4월) 때는 2월공세의 실패 만회, 작전주도권 장악, 노동절에 모택동에게 서울을 선물할 목적으로 실시했다. 이때 국군6사단과 영국 글로스터 대대가 궤멸적 타격을 입었으나, 서울 북방에서 적을 저지했다. 이후 중공군은 정전회담 직전 6차공세(51년 5월)와 휴전협정 직전 7차공세(53년 7월)를 실시했다.

■ 미8군의 작전지도

중공군 5월공세(춘계 2차공세)의 목적은 중동부 전선에 배치된 국군의 섬멸이었다. 51년 5월 16일 중공군은 중동부전선의 미10군단 배속의 국군사단방어지역과 국군3군단 방어지역을 공격했다. 중공군은 홍천 동북방의 미2사단과 인제 남쪽의 국군5사단을 공격함과 동시에 소양강 남안의 국군7사단을 집중 공격했다.

중공군 3개 사단의 집중공격을 받은 국군7사단은 후방으로 50㎞나 후퇴했다.이때 국군5사단과 미2사단의 방어지역도 돌파돼 미10군단 지역에 형성된 돌파구가 확장됐다. 설상가상으로 미10군단 우측부대인 국군3군단이 군단 주보급로이자 유일한 퇴로인 오마치(五馬峙) 고개를 차단당한 상황에서 철수함으로써 중동부 전선에 대돌파구가 형성됐다.

돌파구 좌측은 미2사단이 방어하는 홍천 동북방 벙커고지였고, 돌파구 첨단은 속사리(서울~강릉 도로 지점)에 이르렀으며, 돌파구 우측은 오대산 일대였다. 중공군 첨단부대는 강릉과 정선 방향으로 전과를 확대했다. 더 이상 적이 진출할 경우 유엔군은 전선이 동서로 양단되고, 강릉의 비행기지와 보급기지를 잃게 되면서 동해안의 국군1군단이 삼척으로 후퇴해야 하고, 서울이 다시 적에게 점령될 상황이었다.

미8군사령관 밴플리트 중장은 이를 타개하기 위해 미3사단을 돌파구 첨단부대로 하루 만에 250㎞를 기동시켜 하진부리에서 동북쪽으로 공격게 했고, 국군1군단은 돌파구 우견부인 대관령을 점령한 후 서북방으로 공격게 했다. 미2사단은 돌파구 좌견부인 벙커고지를 견지해 중공군의 서울 북방으로의 우회기동을 차단케 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했다.

중공군은 공세지속과 보급추진능력의 한계로 공격력을 상실하고 작전을 종결하게 됐다. 그러나 국군은 3군단이 해체되고, 동해안에서 운용되던 육본전방지휘소가 폐쇄되는 아픔을 겪었다. 미8군사령관의 이 조치는 국군 지휘관들로 하여금 전장에서 승패와 지휘책임이 무엇인가를 느끼게 하는 값진 교훈이 됐다.


<남정옥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국방일보-2008.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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