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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26 08:4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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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58
글쓴이
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다시보는 6·25-<68>이승만 대통령과 밴플리트 장군
다시보는 6·25 - [군사기획]
<68>이승만 대통령과 밴플리트 장군
밴플리트, 李대통령 친아버지처럼 따라

이승만 대통령은 주한미군 장성들에게 경외(敬畏)의 대상이었다. 그런 미군 장성들을 이대통령은 자식처럼 사랑하며 각별히 대했다. 렘니처(미8군사령관)·테일러(미8군사령관)·화이트(유엔군사령관)·밴플리트(미8군사령관) 장군은 이대통령을 친아버지처럼 따르며 존경했다.

미군 장성들은 한국 근무 이전에는 이대통령을 잘 몰랐으나, 한국에서 그를 만나고 난 뒤에는 그를 존경했다. 미군정의 하지(미24군단장) 중장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시 ‘태평양의 패튼·군인 중의 군인’으로 평가받은 하지도 광복 후 남한의 총독(總督)과 같은 지위에 있으면서도 이대통령의 카리스마·애국심·해박한 국제정세와 학식 앞에서는 꼼짝 못했다.

나중에 하지는 “미군정의 최고 책임자로서 직책은 지금까지 맡았던 직책들 가운데 최악이었다. 내가 정부명령을 받지 않는 민간인이었다면 1년에 100만 달러를 줘도 그 직책을 수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 이박사 같은 한국 지도자를 상대했던 군정은 생각하기조차 끔찍하다”고 회고했다. 이대통령이 그를 심하게 대했던 것은 한국의 이익에 저해되는 미국의 대한정책 때문이지 그에게 감정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대통령 취임 후 이승만은 귀국하는 하지 장군에게 “당신과 나 사이에 때로는 약간의 오해도 있었지만 지금 우리는 완전한 자유독립의 주권국가로서 대한민국을 수립하기 위한 당신의 결의가 성공했음을 알고 있소. 그대는 한국민의 가슴 속에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이며 당신에 대한 우리들의 기억도 영원할 것이오”라고 3년간의 노고를 치하했다.

하지만 미8군사령관으로 부임한 밴플리트 장군에 대한 이대통령의 애정은 남달랐다. 밴플리트 장군은 1951년 4월 14일 미8군사령관에 취임한 다음날 이대통령을 예방했다. 이때 그는 이대통령의 내면적인 강인함에 감복했다. 그는 일제강점기 조국 광복을 위해 옥고를 치르며 고통당했던 애국자인 이대통령의 강인함과 결의를 존중하고 존경했고, 서양인이 한국인의 강인함을 보고 ‘동양의 아일랜드인’으로 부르는 것을 이해했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향후 길고 깊은 우정의 초석이 됐다. 그래서 그는 전쟁 중 양국 간 의견대립이 있을 때 이대통령을 이해하며 친분을 유지했다. 그는 이대통령을 위대한 애국자, 강력한 지도자, 강철 같은 사나이, 카리스마적인 성격의 소유자라며 흠모했다. 그가 51년 중공군 4월공세 때 서울은 프랑스의 파리나 그리스의 아테네와 마찬가지로 중시돼야 한다고 강조해 서울을 사수했던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밴플리트는 워싱턴과 이대통령 사이에 논쟁이 있을 시 그를 지지했다. 그는 이대통령의 한국군 증강 이유를 알았기 때문에 적극 지원했다. 한반도를 통일하겠다는 이대통령의 목표와 휴전협정 체결을 거부하는 그의 심정을 이해했다. 그 때문에 그는 “한국에 남아 있는 것이 더 이상 야전 지휘관의 몫이 아니다”며 한국을 떠났다.

장군이 떠난 후 이대통령이 반공포로를 석방하며 미국의 휴전정책에 반대하자 워싱턴은 이대통령과 친한 그를 주한 미국 대사로 임명해 해결하려고 했다. 그러나 장군은 이대통령을 너무나 존경하며 흠모하기 때문에 본인도 반대하는 휴전정책을 이대통령에게 수락하라고 설득할 수 없다며 대사직을 거부했다. 이런 그를 이대통령이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이대통령이 하와이에서 서거(65년 7월 19일)했을 때 유해를 모시고 한국에 온 사람도 밴플리트 장군이다. 그들의 만남은 현세와 내세를 잇는 ‘아름다운 우정’으로 이어져 세인들의 존경심을 불러 일으켰다.


<남정옥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국방일보-2008.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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