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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28 08:5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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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국군발달사-<17>조병(造兵)과 연구개발
[군사기획] - 국군발달사
<17>조병(造兵)과 연구개발
1948년 12월15일 육군병기공창 창설

정부 수립으로 국군이 출범했지만 병기와 장비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노후화된 미군 장비와 일본군이 남기고 간 99식 소총류가 전부였다. 그래서 당시 미군 철수로 전력 증강이 시급했기 때문에 우리 군은 독자적인 조병과 연구개발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948년 12월 15일 육군특별부대 산하에 육군병기공창을 창설했다.

육군병기공창은 49년 1월 15일 옛 일제의 공장시설을 접수해 제1·2(이상 용산)·3(영등포) 공장으로 확대하고, 병기 부속품과 탄약부품 생산에 적합한 민간공장을 선정해 계열 공장으로 운영했다. 임무는 군·경찰이 보유한 일제의 구식화기에 대한 정비지원과 탄약생산 업무의 수행이었다. 그들은 부족한 기술인력과 기자재를 임기응변식으로 보충하며 수류탄·99식 소총탄·15㎏ 폭탄·지뢰·뇌관 등을 생산해 북한의 잦은 대남도발을 막는 데 기여했다.

육군의 공창은 49년 12월 15일 국방부에 병기행정본부가 설치되자 그 예하로 흡수됐다. 초대 본부장은 채병덕 육군소장이 맡았다. 본부의 기능은 병기의 연구개발과 각군의 병기행정 업무를 통할하고 발전시키는 데 있었다. 즉, 군 병기공장과 민간 병기생산 공장을 관할하고, 각군에 소요되는 병기·탄약·총기와 부속품 생산을 지도·감독하며 후송장비와 정비수리 등의 병기업무를 행정지원한 것이다.

50년 병기감실의 예산을 전용해 병기생산 능력을 확충했을 정도로 시설·예산 부족에도 불구하고 자체 생산과 개발 의욕이 대단했다고 한다.6개월 후인 50년 6월 15일 병기행정본부는 기구를 확대 개편하고 예하에 제1조병창(부산)과 제2조병창(인천)을 두고 서울에 국방부과학기술연구소를 신설, 조병과 연구개발을 본격화했다.

행정본부는 각군과 경찰에서 파견한 대표로 운영위원회를 편성하고, 병기 분야에 권위 있는 사계 인사를 자문위원으로 운영했다. 그러나 10일 후 전쟁이 일어나자 부산으로 이동해 제2조병창과 연구소를 서면에 위치한 제1조병창과 영도의 국립수산시험장에 분산 배치해 업무를 보았다.

그러다가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52년 3월 19일 병기행정본부는 해체에 들어가 그 기능을 국방부 제5국(관리국)으로 이관했다. 제5국에서는 연구소와 제1·2조병창을 관리했으며, 그해 11월 15일 2개의 조병창을 국방부조병창으로 통합했다. 정전 후 국방부조병창은 서울로 이동했으나, 그해 10월 국무회의에서 인천공장(제2조병창 → 제주분창/제주작업소 → 인천 복귀)을 상공부로 이관키로 결정해 기능이 축소됐다.

이후 국방부조병창은 54년 4월 1일 국방부과학기술연구소에 통합됐다. 이 연구소는 54년 7월 10일부로 국방부과학연구소로 격상됐으나 55년 육군조병창이 생겨 연구개발 분야를 종래 병기·탄약에서 군용식량·피복, 유·무기 재료, 원자력 이용, 로켓 등으로 전환했다. 연구소는 59년 7월 27일 1·2·3단 로켓 발사시험에 성공했으며 13건의 발명특허도 획득했다.

그러나 61년 8월 6일 해체로 약 13년간의 업무를 종결함으로써 이제 조병·연구개발 업무는 그날 발족한 육군기술연구소에 흡수됐다. 이후 육군기술연구소는 6·25 전후에 설치된 해군과학연구소·공군기술연구소와 함께 70년 8월 6일 국방과학연구소(ADD)로 흡수돼 한국 군사력 건설사에 새 장을 여는 토대가 됐다.


<백기인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국방일보-2008.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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