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때 육군총참모장은 4명이다. 1950년 6월 25일부터 30일까지 채병덕 소장, 50년 7월부터 51년 6월까지 정일권 중장, 51년 6월부터 52년 7월까지 이종찬 중장, 52년 7월부터 정전협정 체결까지 백선엽 대장이다. 이들 총참모장은 6·25라는 미증유의 전쟁을 맞아 각자 대한민국 최고의 군인이라는 자부심과 독특한 자신만의 개성을 살려 최선을 다했으나 역사적 평가는 자못 엄격했다.
초대 2군사령관을 지낸 강문봉 장군은 6·25 때 육군총참모장을 대상으로 ‘전시 한국군 지휘관의 통솔에 관한 연구’로 83년 연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전쟁에 참전한 장군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를 통해 그들에 대한 평가를 내놓았다. 이는 전시 육군총장의 성적표에 해당된다.
채총장은 전쟁 발발 1주일 만에 작전지휘상의 실패 책임을 지고 해임됐다. 이후 그는 영남지구전투사령관이 돼 파죽지세로 남하하는 북한군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받고 하동전선에서 정찰 도중 적탄에 맞아 전사했다. 그는 인정 많은 건군의 일등공신이었으나, 군인과 최고지휘관이 갖춰야 할 전술능력 부족이 패장의 요인으로 평가받았다.
정총장은 채총장 후임으로 육·해·공군 총사령관 겸 육군총참모장에 임명돼 지연작전, 낙동강선 방어작전, 북진작전, 중공군 개입에 이르기까지 가장 어려운 시기에 임무를 수행했다. 이후 그는 사단장부터 시작해 부군단장과 군단장을 거쳐 정전 후 4성장군으로 진급, 두 번째 총장을 역임했다. 그는 명예심이 강했으나 자기 절제에 약했다. 그는 깔끔한 용모와 매너 그리고 뛰어난 언변술을 지닌 군조직의 제1인자로 평가됐다.
이총장은 태평양전쟁에 참전하고 귀국 후 자숙하는 의미에서 은둔 생활을 하다가 채장군의 간청으로 48년 말 뒤늦게 육군 대령에 특별 임관돼 군에 들어왔다. 그는 전쟁 1주일 전인 6월 18일 수도경비사령관에 취임해 6·25를 맞았다. 그는 다른 장군에 비해 4년이나 늦게 군에 들어왔으나, 북진시 38선을 돌파한 3사단장과 육군보병학교장을 거쳐 총장에 임명됐다.
그의 총장 시절은 정전협상기의 제한된 작전으로 본연의 소임을 다하지 못했다. 이후 그는 육군대학 총장으로 8년간 재직하다가 4·19 이후 국방장관에 발탁됐다. 그는 직업군인이면서 군인 같은 용맹성이 없고, 욕망을 버린 도인 같은 면과 정치적 일선에 용약출사(勇躍出師)하는 2중적 인물로 평가됐다.
백총장은 광복 후 월남해 군에 들어온 뒤 5연대장·정보국장·5사단장을 거쳐 전쟁 직전 1사단장으로 재직 중 전쟁을 맞았다. 그는 전쟁 동안 최장수 사단장, 두 번의 군단장, 최초의 휴전회담 한국 대표, 공비토벌사령관, 총장을 거치는 동안 단 한 번도 전장을 떠나지 않은 유일한 고급지휘관으로 사단장 시절 평양과 서울을 탈환했다. 총장 때 그는 원하지 않는 정전을 지켜보아야 하는 아픔도 겪었다. 전후 그는 군사령관을 거쳐 두 번째 총장을 역임하며 국군20개 사단의 증강이라는 기쁨도 맛보았다. 그는 과묵실천과 독학독습의 인내심을 발휘, 군인 중의 군인, 제1의 작전지휘관으로 평가됐다.
채총장은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갖지 못했으나, 3명의 총장은 각각 특이하면서도 공통성이 교차한 리더십을 통해 민족 최대의 위기인 6·25전쟁에서 군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일면 전쟁, 일면 군의 백년대계를 위해 노력했던 이들은 건군과 호국의 일등공신으로 높이 평가받아야 될 것이다.
<남정옥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