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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자
2008.03.17 09:2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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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36
글쓴이
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다시보는 6·25-<60>이승만 대통령의 휘호와 통일·안보관
다시보는 6·25 - [군사기획]
<60>이승만 대통령의 휘호와 통일·안보관
군 통수권자로서의 위엄·기풍 서려있어

이승만 대통령의 붓글씨는 명필로 통한다. 무릇 조선시대 사대부 가문의 양반 자제가 그러했듯 양녕대군의 후손인 이대통령도 어린 나이(6)부터 한학을 공부하며 과거시험을 준비했다. 그는 13세부터 과거를 봐 낙방했으나 그의 학문적 경지는 일취월장(日就月將)했다. 그는 한학의 정진을 통해 서예에도 일가견을 지녔다.

그가 미국 명문대학에서 짧은 시간에 박사학위를 받은 것도 이런 학문적 토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는 서양사와 국제정치학을 공부해 동서양 학문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망명 때에도 당시선(唐詩選)을 암송하며 틈틈이 한시를 짓고 붓글씨 쓰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그는 박사학위를 받은 서양학문 못지않게 어릴 때부터 익힌 한학과 서예에서 남보다 뛰어났다.6·25 때 그는 동서양의 높은 학문적 경지와 수양에서 우러나온 휘호를 많이 남겼다. 그의 휘호에는 통치철학과 국가관이 담겨 있다. 그는 사기(史記)나 병법에 나온 구절을 곧잘 애용했다.

그중 “국민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해야 나라가 편안하다(民惟邦本 本固邦寧)” “막사에 앉아서 천리 밖의 승리를 결정한다(運籌 握·운주유악)”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공격하면 반드시 빼앗아 낸다(知彼知己 百戰百勝, 戰必勝攻必取)”는 휘호에서 그의 국가통치의 뒷받침이 된 사상적·학문적 심연(深淵)을 가늠케 한다.

그는 일찍이 성삼문을 사숙(私淑)했던 기개 넘치는 현대판 선비였다.그는 특출한 서예 실력을 발휘, 승전부대·지휘관에게 휘호를 내려 사기를 올렸다. 그는 전공이 높고 충성심이 강한 장군에게 붓글씨를 써 줬다.

그는 정일권·강문봉에게 “지략과 용맹에 인까지 겸하니 백번 싸워 백번 이기리라(智勇兼仁 百戰百勝)”, 백선엽에게 “위엄을 안팎에 떨치다(威振內外)”, 이성가에게 “충성심이 해와 달을 꿰뚫다(忠貫日月)”, 박병권에게 “몸 하나로 장성을 대신하네(身作長城)”라는 휘호를 내렸다.

미8군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에게 “한 몸이 흰 구름 위로 솟아 날아와 온갖 나라 공산군 불길 속에서 백번 싸워 공을 이룬 곳은 서구냐 동아냐를 묻지 마소(一身白雲上 萬國赤焰中, 百戰成功地 歐西與亞東)”, 미10군단장 화이트 장군에게 “인의에 지용을 겸해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공격하면 반드시 취한다(仁義兼智勇, 戰必勝攻必取)”는 휘호를 내려 전의를 고취시켰다.

그는 부대를 방문할 때도 부대 특징에 걸맞은 휘호를 내렸고, 전쟁의 교훈을 잊지 않도록 모든 전승비를 붓글씨로 써서 주는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았다. “무적해병(無敵海兵·해병대)” “가는 곳마다 대적할 자 없다(所向無敵·1군사령부)”는 부대의 상징성을 감안해 쓴 것이다. 또 ‘다부동지구전승비’를 비롯해 거의 모든 전적비가 그의 손을 거쳐 세워졌다.

특히 그는 통일완수를 강조하기 위해 부대 방문 때마다 통일 관련 휘호를 써서 군이 이의 주체가 되기를 갈구했다.여기에는 “다같이 뭉쳐서 통일하자(大同團結, 統一達成)” “통일이 제일 먼저다(統一最先)” “압록강과 두만강을 우리 힘으로 완전히 찾겠노라(鴨綠豆滿 唾手完還·압록두만 타수완환)” “우리 산하를 찾아오자(還我山河)”, 북진통일이 있다.

이렇듯 그의 휘호에는 진한 애국애족의 바탕 위에 통일관·안보관이 몸속의 혈관처럼 흐르고 있고, 통수권자로서의 위엄과 기풍이 이를 보호하는 골격처럼 서려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이런 기품과 리더십을 통해 전쟁을 지도한 영명(英明)한 국가지도자였다.


<남정옥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국방일보-2008.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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