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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21 08:3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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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28
글쓴이
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다시보는 6·25-<65>밴플리트 美 8군사령관의 작전 지도
다시보는 6·25 - [군사기획]
<65>밴플리트 美 8군사령관의 작전 지도
지금의 휴전선 확보하는 데 크게 기여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원수의 전격 해임은 한국 전선의 미군 수뇌부 인사에 영향을 줬다. 공석이 된 유엔군사령관 겸 미 극동군사령관에는 리지웨이 미8군사령관이, 신임 미8군사령관에는 미2군사령관 밴플리트(Van Fleet) 중장이 임명됐다. 그는 아이젠하워 대통령·브래들리 합참의장과 동기생이었고,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과 콜린스 육군참모총장은 웨스트포인트 2년 후배였다.

그의 발탁은 전투지휘관으로서의 탁월한 능력 때문이었다. 밴플리트는 맥아더가 해임된 3일 후인 1951년 4월 14일 미8군사령관에 취임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연대장으로 참전해 전투지휘능력을 발휘했고, 이후 9개월 만에 사단장을 거쳐 군단장에 오른 뛰어난 지휘관이었다. 그는 48년 중장 승진과 함께 그리스의 미 합동군사고문단장을 역임했다.

이때 그는 그리스 정부를 도와 공산주의자들의 지원을 받는 반정부 활동을 잠재우는 데 공헌했다. 그는 이 경험을 되살려 51년 말 한국에서 군단급 규모의 공비토벌사령부인 ‘백(白)야전사령부(사령관 백선엽 소장)’를 설치, ‘밤의 인민공화국’으로 통한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과 북한군 패잔병들을 일거에 소탕해 후방을 안정시켰다.

그는 이런 야전지휘관으로서의 특출한 능력과 공산주의자들과의 투쟁경력을 인정받아 미8군사령관에 발탁됐다. 밴플리트는 6·25 때 미8군사령관 4명 중 가장 오래 재직했다. 그는 워커(6개월)·리지웨이(4개월)·테일러(6개월)에 비해 훨씬 긴 2년(51. 4~53. 2)을 재직하며 한국군 발전(육사 4년제·20개 사단 창설)에 크게 공헌했다.

하지만 그는 제한된 지휘권을 갖고 돈틀리스작전(철의삼각지대 확보) 중 군사령관에 취임했다. 그는 야전지휘관으로서 최악의 전장환경인 휴전협상 속에서 제한된 전쟁을 수행해야 했다. 리지웨이는 향후 미8군의 작전권을 제한했다.

그는 철의 삼각지대 확보를 위해 설정한 중간 통제선인 유타(Utah·금학산 - 광덕산 - 백운산)선 이북으로 진군할 때는 보고 후에 실시하게 했고, 최종 통제선인 와이오밍(Wyoming·연천 - 고대산 - 와수리 - 화천저수지)선 이북에서 작전할 때는 반드시 그의 승인을 받도록 했다.

한편 밴플리트의 미8군사령관 취임 후 중공군은 그의 능력을 시험하려는 듯 연거푸 두 차례(51년 4월·5월)에 걸쳐 대규모 춘계공세를 감행해 서울 점령과 빼앗긴 주도권 장악을 위해 광분했다. 그러나 그는 중공군 춘계공세를 섬멸적 타격으로 극복한 데 이어 와이오밍선을 확보했고, 나아가 동부전선의 진출선을 신캔사스선(문산~전곡~화천저수지~펀치볼~향로봉~거진)까지 연장했다.

특히 그는 상급 부대의 제한된 작전지침 속에서도 39선(평양~원산)을 확보하고자 하는 대담한 상륙작전을 계획했으나 워싱턴과 도쿄로부터 미군의 과도한 손실 방지와 휴전에 악영향을 준다는 이유로 거부당했다. 하지만 그는 2년 동안 수많은 공격작전(크리퍼작전·코만도작전·카운터작전·쇼다운작전)을 통해 오늘날의 휴전선을 확보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에 한국 정부는 건국훈장을, 서울대는 명예박사 학위를, 육군사관학교는 교내에 동상을 건립해 그의 드높은 공적을 기렸다.


<남정옥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국방일보-2008.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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