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정부 수립으로 조선경비대는 ‘대한민국 국군’으로 개편됐고, 국군 조직법과 국방부직제에 따라 군 구조(military organization)로 현대적인 3군체제를 갖췄다. 국방부는 군무·정훈·관리·정보의 기본 4국과 특별국인 항공국으로 편성하고, 장관 예하에 국방참모총장을 둬 군정·군령을 일원화했다.
그러나 국방정책은 정부의 ‘국방치안시책’과 별반 구분이 없었다. 내무부와 공동 청사(외환은행 본점)를 사용하고 국방장관이 총리를 겸직했듯이 정책적 분화가 분명하지 않았던 것이다.당시 국방정책의 기조는 ‘연합국방’이었다. 그 같은 기조는 현대전이 단순한 무력전이 아닌 총력전·연합전쟁의 성격을 띠기 때문에 자유세계의 국방역량을 총결집해 반(反)공산주의 국제연대가 불가결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전쟁방지를 위한 군사외교 강화, 사병제일주의에 입각한 정병 양성 및 전력 육성, 그리고 체제의 정통성과 사상무장에 의한 군 일체화 등의 정책적 지향이 이를 잘 말해준다. 이범석 장관은 국방정책의 본질에 대해 “군은 본래 질만 가지고는 안 되며, 양만 가지고도 안 된다. 양은 유형의 존재이며, 질은 무형의 존재로 이것이 함께 종합돼야 한다.
제아무리 질이 선량하더라도 양이 극도로 부족하면 난을 능히 극복하지 못한다”라고 강조했다. 건군기 국방의 수장은 이범석·신성모 장관이었다. 양 장관의 정책은 다소 차이가 있지만 기본틀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장관은 정예 군사력 건설을 목표로 부대 증설과 기본 군 조직을 편제화했다. 국군조직법·국방부직제 등 관련법을 제정해 국방제도를 마련하고, 국군3대선서문 등을 통해 사상·이념적 일체감 조성에도 힘썼다.
신장관은 49년 3월 20일 취임해 51년 5월 5일까지 재직했다. 그는 특수공작국인 국방부 제4국과 국방참모총장제 폐지, 여단의 사단 승격과 증편, 공군·해병대 창설, 본격적인 숙군, 병역법 제정을 통한 국민개병제 시행 등을 추진했다. 또 장교의 해외 파견과 병과학교 설치를 통한 전문인력 양성, 예비군인 호국군 폐지와 이를 대신한 청년방위대를 창설하기도 했다.
그 무렵 주한미군 철수에 따른 장비 이양과 군사력 증강이 절실했다. 그러나 제반 열악함은 쉽게 극복되지 않았다. 정부는 국방비를 48년 기준으로 당초 예산 대비 9.2%에서 49년 32.8%로 증액했다. 다시 50년도에는 250억으로 정부예산의 23.8% 수준을 유지했지만, 중국 공산화와 소련 지원에 힘입은 북한의 전쟁도발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대대적인 북한의 공비침투도 정규사단의 토벌작전 투입을 강요해 국군의 전력발전에 차질을 빚게 했다.국군의 전력 증강은 사실상 미 원조에 달려 있었다. 그러나 50년 1월 한미 상호방위원조협정을 체결, 뒤늦게나마 1097만 달러의 군원이 확정됐고, 52년 1월 미 대외원조법에 따라 1500만 달러가 전쟁 중에 이행됐지만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결국 6·25전쟁은 유엔군 참전에 의한 연합전력으로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니, 역설적으로 연합국방의 정책적 실효성이 입증된 셈이다. 지정학적으로 한민족의 주변국 관계에 일관되게 존재해 온 4극(極)의 실체를 재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백기인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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