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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28 08: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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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다시보는 6·25-<53>공산군의 중조연합사 창설과 작전지휘
다시보는 6·25 - [군사기획]
<53>공산군의 중조연합사 창설과 작전지휘
한국전선서 공산군 지휘하는 최고사령부 역할

▲창설배경

‘중조연합사(中朝聯合司)’는 6·25때 한국전선의 전 공산군을 지휘하는 통합사령부다.이는 중공군이 한국전선에 참전한 이후인 1950년 12월 초 중공군과 북한군의 지휘통일을 위해 설치됐다. 중공군 개입 초기 중공군과 북한군은 통일적인 지휘체계의 미비로 작전에 차질을 빚었다. 중공군 1차 공세 때 북한군은 남진하는 중공군을 적으로 오인해 공격했고, 또 군수·병참면에서도 이를 통제하는 최고연합사령부가 존재하지 않아 작전에 혼란을 초래했다.

중공군은 작전의 혼선과 차질을 방지하기 위해 통합사령부의 설치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느끼고 이를 추진했다. 중공군은 가급적 2차공세 개시 전에 통합사령부 구성을 끝내고자 했다. 이에 팽덕회는 11월 초 모택동의 지시에 따라 중공군사령부에 나와 있던 북한 내무상 박일우를 김일성에게 보내 이 문제를 협의토록 했다.

김일성은 박일우·소련대사(슈티코프 대장)·소련군사고문단장(바실리예프 중장)과 이 문제를 협의했으나 소련 측 반대로 성사되지 않았다. 통일적인 지휘체계 문제가 뜻대로 되지 않자 중공지도부는 이를 해결하는 데 스탈린의 판단과 결심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스탈린에게 이를 보고했다.

스탈린은 중국의 입장에 적극 동의함은 물론 이런 사실을 김일성과 슈티코프에게 통보했다. 이로써 50년 12월 초 한국전선에서 중공군·북한군을 통합지휘할 중조연합사가 비밀리에 창설됐다.이때 김일성이 북한군의 작전지휘권을 넘겨줌에 따라 중조연합사는 한국전선의 전 공산군을 지휘하는 최고사령부 역할을 하게 됐다.

▲편성과 역할

중조연합사는 사령관·정치위원에 팽덕회, 부사령관에 북한군총참모장 김웅, 부정치위원에 박일우가 맡았다. 당시 북한군총참모장은 동부전선에서 북한군(3개 군단)을 지휘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정치위원 박일우가 중공군사령부에 머무르게 됐다. 연합사는 전선의 제반작전을 통괄했고, 북한은 후방동원·훈련·군정·경비를 맡았다. 하지만 병참 체계상 중요한 철로·운수는 연합사가 통제했다.

그럼에도 공산 측은 중조연합사의 존재를 비밀로 했고, 이를 위해 군 내부 문서에서조차 그 명칭을 사단·군단사령부급에만 사용하도록 엄격히 제한했다. 연합사 예하에는 기능사령부를 설치·운영했다. 중조공군연합집단사령부, 중조연합철도군사운수사령부, 동·서해안방어사령부가 그것이다. 이들 사령부의 정(正·사령관)은 중공군이, 부(副·부사령관)는 북한군이 각각 맡았다.

중조연합사의 작전지휘는 3차 공세부터 관장했다. 연합사는 중공군 6개 군과 북한군 3개 군단 등 총 9개 군단 30만 명을 작전에 투입했다. 공산군은 50년 12월 31일 38선의 200㎞ 전 전선에서 공격을 개시, 서울을 점령 후 37도선까지 진출했다. 이때 김일성과 소련대사·군사고문단장은 연합사령관 팽덕회가 내린 추격 정지 명령에 강력히 반발했다.

이들은 계속 남하해 ‘한반도의 적화통일’을 주장했다. 하지만 팽덕회는 유엔군이 공산군을 깊숙이 끌어들여 상륙작전을 시도할 것으로 판단했다. 또 그는 전선의 종심이 신장됨에 따라 보급에 차질이 생기고, 장기간 전투로 부대의 피로가 누적돼 휴식과 정비가 필요하다고 봤다.

이런 조치는 연합사라는 지휘권의 단일화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때 팽덕회가 김일성의 요구대로 계속 남진했다면 공산군은 그가 예상했던 대로 결정적 패배를 입었을 것이라는 것이 군사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남정옥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국방일보-2008.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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