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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18 08:3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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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다시보는 6·25-<56>6·25와 군인 박정희
다시보는 6·25 - [군사기획]
<56>6·25와 군인 박정희
현역으로 복직…‘숙명적 운명’속으로

▲광복이전 경력

6·25는 한국 현대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한 인물을 구했다. 그는 박정희로 1917년 11월 14일(음력 9월 30일) 경북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구미에서 초등학교를 나와 그 학교 창설 이래 최초로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했다. 37년 사범학교를 졸업한 그는 문경공립보통학교에서 3년간 교사생활을 한 후 만주신경군관학교에 입교했다.

그는 39년 10월 군관학교 시험을 거쳐 40년 4월 2기로 들어갔다. 이때 그는 23세로 동기생보다 나이가 4∼9세나 많았다. 하지만 그의 입교 성적은 전체 15등으로 우수했고, 42년 3월 졸업시에는 수석을 차지해 그 특전으로 일본 육사에 유학했다. 강문봉 장군의 신경군관학교 지원동기도 “그가 군관학교를 수석·졸업해 만주국 황제상을 받는 뉴스를 보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44년 4월 그는 일본 육사 졸업(3등) 후 소대장 실습과 현지 부임 교육을 받고나서 만주 열하성 흥륭현에 위치한 만주군 보병8단(團·연대)에 배치돼 광복 때까지 근무했다. 그때 그는 중위였고, 이 부대에는 신현준·이주일이 있었다.

▲불우하지 않은 군 생활

광복 후 박정희는 무장해제를 당하고 북경·천진을 거쳐 46년 5월 8일 부산에 도착했다. 6년 만에 빈털터리로 귀향한 그는 가난에 찌들어 있던 가족들의 환영을 받지 못했다. 그는 구직을 위해 서울로 올라와 군인의 길을 선택했다. 그는 46년 9월 24일 2대1의 경쟁률을 뚫고 29세의 늦은 나이에 조선경비사관학교(육사) 2기로 입교해 3개월의 군사교육 후 12월 14일 소위로 임관(3등 졸업)했다.

그는 강원도를 담당한 8연대 38경비중대 4소대장에 보직됐고, 중대장은 김점곤 중위였다. 그 후 그는 연대작전참모대리에 보직돼 연대장 교단에게 각개전투부터 대대 야외기동훈련까지 교육했다. 그는 실력을 인정받아 중위를 거치지 않고 대위로 승진해 47년 9월 육군사관학교 중대장에 보직됐다. 그는 육사에서 중대장과 전술학 교관으로 5기·7기 특별교육 중 소령에 진급했으나 48년 8월 7기 특별반 구보시 후보생 사망으로 중대장에서 해임됐다.

여순사건 후 남로당 관련 혐의로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육본 정보국장(백선엽)의 도움으로 사형집행 면제와 동시 파면(49년 4월)됐다. 파면 후 그는 백선엽의 선처로 육본 정보국에 근무했다. 6·25 때 그는 정보국의 문관 신분에서 현역으로 복직했다. 그는 50년 6월 21일 집안 제사로 고향에 내려갔다가 전쟁 소식을 듣고 자진 상경해 정보국에 합류했다.

이로써 그는 좌익 혐의를 벗게 됐고 정보국장(장도영) 건의로 7월 소령 복직과 동시에 전투정보과장에 임명되면서 새 삶을 살게 됐다. 9월 15일 중령에 진급한 그는 10월 장도영이 9사단장으로 나갈 때 참모장으로 따라갔다. 그는 51년 중공군 5월 공세 직전까지 참모장으로 있으면서 결혼(육영수)도 하고 대령 진급도 했다. 휴전 때까지 그는 정보학교장·작전국차장·포병전과교육(2등)을 거쳤다.

그해 11월 25일 그는 장군이 된 후 포병학교장·사단장·1군참모장·육본 작전참모부장·관구사령관·군수기지사령관·2군부사령관의 화려한 경력을 쌓았다. 숙군의 깊은 상처에도 불구하고 그는 진급과 보직에서 동기보다 앞섰다. 여기에는 그의 명석한 두뇌와 발군의 실력, 그리고 백선엽·장도영 등의 후원에 힘입었다. 그는 6·25라는 민족적 비극을 뚫고 흙탕 속의 연꽃처럼 군인으로 다시 태어나 그의 숙명적 운명에 도전할 채비를 갖췄다.


<남정옥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국방일보-2008.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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