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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20 19: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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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국군발달사-<5>해군 창설 과정
[군사기획] - 국군발달사
<5>해군 창설 과정
해방병단·해안경비대 거쳐 1948년 새 출발

1945년 11월 11일 해군 건설에 뜻을 둔 손원일과 정긍모 등 해사·해양 관계자들에 의해 해방병단(海防兵團)이 창설됐다. 광복 직후 해양인들이 결성한 해사대(海事隊)를 기초로 한 창단이었다. 얼마 후 해방병단은 해안경비대로 명칭을 변경하고 장차 해군이 될 준비를 갖춰 나갔다. 군사고문단(KMAG) 자료에 의하면 군정청에서도 이미 간부 육성을 위한 사관학교 설치 외에 200명 수준에 이르는 해안경비대 조직에 합의한 터였다.

해방병단 창설에는 해사 관련자들 중에서 중학 이상의 학력을 소지한 인사들이 참여했다. 70명의 대원은 당일 오전 11시 표훈전(서울 종로 관훈동 118)에서 미 군정청의 해사 국장 카스텐 해군소령이 참석한 가운데 결단식을 가졌다. 훗날 이날이 해군 기념일로 됐다.

단장 손원일과 민병증·김영철·정긍모·석은태·변택주·김정주 등이 주요 간부였다. 그들은 그날 교통국에서 주선한 특별 열차로 이튿날 진해에 도착해 통제부 항무과 사무실을 빌려 시무에 들어갔다.

그러나 해방병단이 미 군정청의 법적인 승인을 받은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출발부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사무실은 해결했지만 당장 식량을 비롯한 보급·지원 등이 문제였다. 그러던 중 46년 1월 14일 해안에 관한 업무가 군정법령 제42호로 국방사령부로 이관되면서 해방병단은 안정을 찾게 됐다. 때마침 5월 10일 미 합참도 한국에 해안경비대 창설을 승인했다.

이런 상황에서 46년 6월 15일 해방병단은 군정법령 제86호에 의거, 조선해안경비대로 명칭을 바꿨다. 사령부인 해방병단총사령부 또한 조선해안경비대총사령부로 변경하고 1월 14일부로 소급 적용했다. 그들은 조함창을 만들어 100톤급 보트 1척과 증기선 2척을 보수했으며, 47년 2월 300톤급 충무공정을 건조했다. 그리고 인천기지를 중심으로 수 척의 소형 함정을 확보해 해안경비 임무를 수행했다.

해안경비대의 발전에는 매캐이브(G. E. McCabe) 해군대령 등 16명의 미 해안경비대원으로 구성된 고문단의 기여가 컸다. 그들은 46년 9월에 인천·묵호·목포 등 각 기지와 진해에 설치된 훈련소에 파견돼 효과적인 부대 편성과 관리에 도움을 줬다. 미군으로부터 함정도 도입됐는데, 46년 9월 15일 최초로 상륙정(LCI) 2척의 인수를 시작으로 해군 개편 때까지 유조선(YO-1)과 소해정(JMS/YMS) 등 모두 36척의 군함을 인수했다.

해안경비대는 조직을 강화하면서 48년 정부 수립시 해군으로 개편됐다.

해군은 48년 11월 30일 공포된 국군조직법(법률제9호)에 따라 해군 기구를 강화했다. 초대 해군총참모장에는 손원일 제독이 임명됐다. 사령부인 해안경비대총사령부는 해군총사령부로 개칭했다가 12월 15일 해군본부로 새 출발했다. 해군의 창군 정신은 그들이 제창한 표어 안에 잘 드러나 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이 몸을 삼가 바치나이다.’


<백기인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국방일보-2008.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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