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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27 08:4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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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국군발달사-<6>해군 창설 과정
[군사기획] - 국군발달사
<6> 해병대 창설
진해 덕산비행장서 1949년 4월 창설

해병대 창설은 국군이 현대적인 3군 체제를 갖춰 가는 과정에서 상륙작전에 필요한 부대를 육성할 목적에서 비롯됐다. ‘여순 10·19 사건’ 직후인 1948년 11월, 임시정대지휘관 이상규 해군소령의 작전보고서와 신현준 중령의 건의를 계기로 해군 수뇌부에서는 부대 창설을 적극 검토했다.

이듬해인 49년 2월 1일, 해군 진해통제부의 참모장 신현준 중령을 해병대사령관에, 교육부장 김성은 중령을 참모장에 임명하면서 그 추진이 본격화됐다. 창설안은 3월 1일 작성을 완료해 채병덕 국방부 참모총장에게 제출됐다. 우선 보병대대로 편성하고, 50년 5월 31일까지 장갑대대 및 대전차대대를 증편해 장차 필요시 해병사단을 조직한다는 복안이었다.

그러나 해병대는 상륙작전부대가 아닌 해군기지 경비를 목적으로 한 군사조직으로 승인됐다. 육군과 같은 지상전투부대가 필요 없다는 의견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편성과 훈련은 육군식이었지만, 미 해병대와 같은 부대를 목표로 했기에 ‘육전대’라 하지 않고 ‘해병대’라 불렀다. 그 후 해병대령 개정(대통령령 제672호 : ’52. 8. 16)을 통해 부대 임무를 상륙작전 위주로 조정했다.

드디어 49년 4월 15일, 해병대는 총 380명으로 보병대대를 편성하고 진해 덕산비행장(K-10)에서 창설식을 가졌다. 창설 요원 380명은 해군에서 편입된 장교·하사관 80명과 신병 300명으로 구성됐다. 신사령관은 훈시를 통해 “국가와 국민을 위해 자유를 수호하는 역사를 창조하자”고 역설했다.

그들은 식 후 전원 완전무장하고 ‘무적의 해병’을 건설한다는 포부를 다지며 해발 500m의 천자봉(쌍투바위)을 휴식 없이 구보로 점령해 그 기상을 드러냈다.창설의 법적 근거는 같은 해 5월 5일 해병대령(대통령령 제88호)의 공포로 마련됐다. 이로써 해군의 예속 부대로서 해병대 창설이 추인됐다. 비행장의 격납고가 그들의 막사였으며, 장교는 육사9기로 위탁한 후보생 30명을 해병장교로 임관 충원했다.

병력은 해군 제13기 중에서 신병 303명과 제14기 440명을 선발해 해병 제1·2기로 삼았다. 부대는 2개 전투대대와 독립 2개 중대, 1개 대전차포 소대로 편성했는데 화력은 개인화기인 소총(99식·38식·카빈)을 제외하면 경기관총(LMG) 6정, 중기관총(HMG) 3정, 60㎜ 박격포 4문, 81㎜ 박격포 2문뿐으로 열악한 상태였다.

그러나 해병대는 49년 8월 15일 광복 4주년 및 정부 수립 1주년 기념행사로 열린 3군 사열식에 참가해 그 존재를 온 국민에게 알렸다.해병대 병력은 6·25전쟁 직전에 1166명이 됐다.

해병대는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정신으로 기틀을 다져가던 중 6·25전쟁을 맞아 진동리지구와 통영상륙작전에서 빛나는 전공을 세워 ‘귀신잡는 해병대’라는 애칭을 얻었다. 그리고 인천상륙작전·수도탈환작전에서 크게 활약,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면서 용맹한 해병대상을 각인시켰다.


<백기인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국방일보-2008.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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