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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27 17:0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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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다시보는 6·25 -<36>백인엽 장군의 백의종군과 서울탈환작전
다시보는 6•25 - [군사기획]
<36>백인엽 장군의 백의종군과 서울탈환작전

사단장서 연대장으로 전투 지휘


백의종군은 정식 계급이나 직책을 떠나 그보다 낮은 신분으로 전쟁에 참전하는 것을 뜻한다. 대표적인 예가 임진왜란시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낸 이순신이 도원수 권율 휘하에서 ‘종’에 가까운 신분으로 복무한 것을 들 수 있다. 이와는 경우가 다르지만 6•25 때 자신의 계급보다 낮은 보직을 받거나 높은 직책에서 낮은 직책으로 전투에 참가한 사례가 있다.

그중 하나가 개전 이후 1년 동안 3군총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정일권 중장이 미국 유학에서 돌아와 2사단장에 임명될 때, “이충무공의 백의종군 정신으로 싸우겠다”는 것이었다. 3성 장군의 사단장 임명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또 하나는 전공이 많은 백인엽 대령이 사단장에서 연대장을 한 경우다. 그는 1950년 8월 초 17연대장에서 수도사단장에 임명됐다.

수도사단은 8월 1일 경북 안동에서 철수한 후 청송에서 2개 연대(기갑연대•18연대)가 적의 포위공격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자, 국방부는 지휘책임을 물어 김석원 사단장을 해임하고 백인엽 대령을 임명했다. 신성모 국방장관은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전쟁을 잘하는 사람을 사단장에 임명하라’는 지시를 받고 백인엽을 추천해 재가를 받았다.

최연소(27) 사단장이 된 백인엽은 50년 8월 낙동강 방어선의 중동부 전선인 안강~기계에서 북한군 12사단과 766부대에 궤멸적 타격을 주고 이 지역을 사수했다. 이때 수도사단에 패한 766부대는 비학산에서 해체돼 북한군 12사단에 흡수됐다.한편 인천상륙작전에 한국 육군의 참전이 결정되면서 지휘관 선정문제가 논의됐다.

대통령이 이때도 전쟁을 잘하는 사람이 좋겠다고 하자 국방장관이 백인엽이가 어떻겠느냐는 물음에 대통령이 좋다고 해서 그가 결정됐다. 그런데 신장관은 사단장을 한 사람에게 연대장하라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그에게 사단장을 했는데 연대장을 할 수 있겠느냐고 묻자, “전쟁을 하는데 사단장이면 어떻고 연대장이면 어떤가. 중대장도 괜찮다. 백의종군 하겠다”고 말했다. 당시 사단장 보직은 장군으로 진출할 수 있는 지름길이었다.

▲17연대와 서울탈환작전

인천상륙작전부대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이대통령은 신장관에게 육군부대를 유엔군으로 보내되 훌륭한 부대를 보내라고 지시했다. 신장관은 백연대장에게 어느 부대를 데리고 가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생사고락을 같이한 17연대를 데리고 가겠다고 말하자 정일권 참모총장이 전황상 17연대는 안 된다고 했다. 17연대는 경주에서 중요한 전선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차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략적 측면에서 보다 중요한 임무를 위해 17연대 차출이 불가피했다. 이로써 그는 사단장에서 17연대장이 돼 서울탈환작전에 참가했다.이대통령의 뜨거운 환송을 받은 17연대는 인천상륙에 이어 미7사단 예하로 서울탈환을 위해 잠실에서 도하작전을 실시해 남산을 점령하고, 적의 증원과 퇴로 차단을 위해 망우리에 배치된 후 서울시내로 이동했다.

9월 28일 서울수복 후 17연대가 경무대 경호와 수도경비임무를 수행하는 것을 보고 미군들은 17연대를 ‘서울연대’로 불렀다. 이렇듯 백인엽의 17연대는 서울탈환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그 결과 백인엽은 장군 진급과 동시 정보국장으로 영전했고, 17연대는 2사단에 예속된 후 저격능선전투에서 중공군을 격파하고 그 용맹을 과시했다.

<남정옥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국방일보-2007.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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