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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12 08:4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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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다시보는 6·25 -<42>중공군 개입후 미국의 대응
다시보는 6·25 - [군사기획]
<42>중공군 개입후 미국의 대응
전쟁 확산 우려 휴전정책 추진


▲맥아더사령부의 반향과 조치

6·25전쟁 초기 한국전선을 책임지고 있던 전구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중공군 개입 및 공세를 빗대어 ‘전혀 새로운 전쟁’으로 평가했다. 합참의장 브래들리 원수는 맥아더 청문회에서 중공군의 한국전 개입을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시기에 잘못된 적과의 전쟁’으로 증언했다.

이는 인천상륙작전 이후 압록강·두만강으로 쾌속 진군하던 유엔군의 북진 작전에 커다란 차질을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유엔이 결의했던 ‘자유·민주·통일한국’의 꿈이 산산이 부서지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전에서 중공군의 개입은 북한군의 6·25 남침과 맞먹는 충격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중공군 개입은 북한군에는 행운이었지만 통일을 목전에 두고 있던 한국·유엔군에는 청천벽력과 같은 것이었다.

중공군 개입 직전 유엔군의 북진은 ‘대나무에 칼을 대면 거침없이 쪼개지듯 나아가는 파죽지세(破竹之勢)’였다. 이는 북한군의 사기저하 등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으나 근본적 문제는 엄청난 전력상의 불균형이었다. 북진 당시 북한군의 월북 병력은 2만5000명인데 비해 국군·유엔군의 병력은 23만 명으로 열 배가 넘는 대군이었다.

이에 맥아더 사령부는 10월 2일 작전명령 2호로 발표했던 유엔군의 전진 한계선과 작전 통제선으로 설정했던 맥아더 라인(정주~함흥), 10월 19일 재설정했던 뉴맥아더라인(선천~성진)을 철폐하고 11월에는 소위 북진통일의 마지막 관문인 중소 국경을 목표로 한 크리스마스공세, 즉 ‘재난으로의 눈 먼 행진’을 감행했다.

전투 결과는 참담했다. 중공군 30만 대군의 기습 공격에 유엔군은 전선 곳곳에서 참패했다. 그 여파로 미2사단장과 국군의 2개 사단장이 작전 실패로 사단장직에서 해임됐다. 또 국군2군단은 해체되는가 하면, 국군 3개 사단과 미2사단은 전투력을 상실하고 재편성에 들어갔다.

특히 전투 과정에서 국군 연대장의 전사(19연대장)와 실종(국군10연대장), 미군 연대장의 포로(미7사단 31연대장) 등 병력·전투장비의 막대한 손실로 각급 부대는 전투의지를 상실한 채 공황에 빠졌다. 이런 상태에서 유엔군은 다시 38선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워싱턴과 연합국의 반응

중공군의 개입은 참전 우방국, 특히 미국에 충격이었다. 하지만 중공군 1차 공세 후 미국은 신중히 대처했다. 이때 애치슨 국무장관은 압록강을 중심으로 10∼20마일에 달하는 완충지대 설치 검토를 건의했으나 군부 반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미국의 최대 우방국인 영국·프랑스에 미국이 아시아에 깊숙이 개입함으로써 전쟁을 확대하거나 이로 인해 유럽을 포기할 의도가 없다고 인식시키려 했다. 참전 우방국은 확전을 우려했다.

하지만 중공군 2차 공세 후 유엔군이 군사적 참패를 당하면서 워싱턴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미 합참은 콜린스 육군참모총장을 도쿄로 보내 한국 전황을 파악하도록 했고, 국가안보회의를 열어 대책을 논의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미국이 궁극적으로 취해야 할 조치는 어느 것이나 소련과의 전쟁이 결과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취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당시 미국은 비록 원자탄 사용과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했으나 결국 맥아더의 확전론(만주폭격·원자탄 사용) 대신 제한전략 속에서 최초 미국의 전쟁목표인 전쟁 이전 상태 확보를 위한 휴전정책을 추진했다.


<남정옥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국방일보-2007.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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