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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19 09:4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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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96
글쓴이
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다시보는 6·25 -<43>장개석 ‘자유중국군’의 파병 제의와 무산
다시보는 6·25 - [군사기획]
<43>장개석 ‘자유중국군’의 파병 제의와 무산
중공의 한국전 개입 전쟁 확대 우려


▲북한군 남침 이후 장개석의 제의와 한미 반대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가 대륙을 상실하고 대만으로 철수한 것은 중공이 정권을 수립한 2개월 후인 1949년 12월 8일이었다. ‘자유중국(대만)’은 미국 다음으로 한국 정부를 승인한 국가이면서 49년 대사를 파견한 수교국이었다. 초대 주중 한국대사는 신석우였고, 주한 중국대사는 소육린이었다. 그때 자유중국의 국력은 보잘 것 없었다.

6·25 당시 대만은 인구 750만 명에 병력은 42만8000명이었다. 장개석군은 무기·장비 면에서 뒤떨어져 있었고, 보유하고 있던 무기도 미국·일본·소련·독일제로 혼합 편성됐다. 그것도 군인 2.5명당 한 정밖에 갖고 있지 않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장개석은 미국 정부와 극동군사령관 맥아더 원수에게 산악과 평지전투가 가능한 3개 전투사단(3만3000명)과 이를 공수할 20대의 수송기, 필요할 경우 해상수송선을 제공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맥아더 장군은 자유중국군이 훈련이 부족하고 포병·박격포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이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 미국 정부는 이를 구실로 중공이 한국전에 개입해 전쟁이 확대될 것을 우려했고, 미 합참도 전투력이 떨어지는 자유중국군을 장비하고 수송하는 것보다 미 본토 병력을 파병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라 판단하고 이를 거절했다.

특히 이승만 대통령은 자유중국군의 파병이 자칫 중공군의 참전을 불러와 한국을 ‘제2의 국공내전장’으로 만들어 한국의 통일을 방해하지 않을까 하는 차원에서 장개석의 제의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중공군 개입 이후 맥아더의 요청과 무산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맥아더는 유엔군의 추가 병력을 보충하는 방안으로 합참에 장개석군의 파병을 요청하게 됐다. 맥아더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상황이 달라졌다고 판단하고 50년 11월 말 합참에 장개석군의 파병을 정식 요청했다. 그는 중공군에 대해 싸울 수 있는 유일한 부대는 자유중국군이라고 했다.

맥아더는 장개석군은 2주 내에 전선에 도착할 수 있으며, 애초에 제안했던 3만3000명보다 많은 병력을 보낼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워싱턴은 장개석군의 참전으로 자칫 중공과의 전면전을 촉진해 미국을 준비되지 않은 세계 전쟁으로 끌어들일 수 있고, 또 다른 유엔 참전국들이 반대할 것이라며 수락하지 않았다.

특히 장개석군의 참전은 미국이 유럽 방위에 훨씬 더 낮은 비중을 둔다는 오해를 서유럽 국가에 주게 될 뿐만 아니라 전쟁을 정치적으로 해결하려는 미국의 노력에 걸림돌이 될 것으로 판단했다. 미국은 장개석군의 참전은 어떠한 경우에도 한국사태에 도움을 주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럼에도 합참은 맥아더에게 구체적인 회답을 주지 않았다. 다만 합참은 맥아더에게 자유중국군 참전 문제는 국제적으로 영향을 미쳐 미국과 결속된 국가들과의 행동 통일을 저해, 우방국들로부터 미국을 고립시키게 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합참의 이러한 배경에는 51년 1월 합동전략조사위원회의 결론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이 위원회에 따르면 “장개석군의 참전은 한국전에 중대한 영향을 주지 못한다. 미국은 대만에 군사·기술 원조를 제공하고 중국 내 게릴라에 대한 지원을 제공해야 한다”고 했다. 결국 자유중국군의 한국전 파병은 이러한 결론에 따라 이루어지지 않았다.


<남정옥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국방일보-2007.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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