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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04 19: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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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다시보는 6·25-<45>아이젠하워 방한과 대한정책 변화
다시보는 6·25 - [군사기획]
<45>아이젠하워 방한과 대한정책 변화
미군 철수 미군 유지로 전환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 당선자의 방한

아이젠하워는 1952년 11월 미국 대통령 선거전에서 한국전쟁 종식을 공약사항으로 내세워 당선됐다. 그는 대통령 선거전에서 ‘아시아인의 전쟁은 아시아인이 담당하도록 한다’는 취지 하에 한국군을 10개 사단에서 20개 사단으로 증강시키고, 미군을 한국으로부터 철수하겠다고 공약했다.

그의 이런 발언은 한국에서 휴전을 기대하던 미국 유권자들에게 많은 호감을 주었다. 그래서 그는 대통령 당선자 자격으로 52년 12월 2일 한국을 방문했다. 아이젠하워 한국 방문에는 브래들리 합참의장·윌슨 국방장관 지명자·해거티 공보비서·퍼슨스 퇴역 육군 장군, 그리고 이오지마에서 합류한 래드포드 태평양함대사령관 등이 수행했다.

당시 한국에는 아이젠하워 아들 존 아이젠하워 중령이 미3사단에서 대대장으로 근무하고 있다가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밴플리트 장군은 안전을 고려해 그의 보직을 정보참모로 바꿔 줬다. 북진시 미1군단 정보참모 톰프슨 대령은 존의 장인이었다.아이젠하워는 2박 3일간의 방한 동안 한국전황과 한국군 증강문제에 대한 보고를 받고 수도사단 등을 시찰하며 장병들을 격려했다.

또 이승만 대통령을 경무대로 예방하고 환담을 나눴으나 한국 문제에 대한 심도 있는 토의는 하지 못했다. 다만 그가 한국을 방문하는 동안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으로부터 39도선으로의 북진계획을 건의받았으나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대통령이 아닌 대통령 당선자라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으나 이때 그는 이미 전쟁을 휴전으로 종결한다는 복안을 갖고 있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대한정책

53년 1월 20일 아이젠하워가 미국 34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때까지 한국전쟁은 포로 문제로 정전협상이 난항을 거듭하고 있었고, 전투는 소규모 고지쟁탈전으로 일관되고 있었다. 대통령에 취임한 후 아이젠하워는 정전협상에 응하지 않은 중공을 압박하는 조치를 취했다. 중공은 지금까지 중국 본토에 대한 장개석 대만 정부의 군사적 위협에 별 부담을 갖지 않고 한국 전선에만 모든 군사력을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대만 중립정책 포기 성명으로 중공은 군사적·심리적으로 커다란 부담을 안게 됐다. 미국의 이러한 방침은 공산 진영 전략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때 정전 협상에 전환점이 될 사건이 발생했다. 53년 3월 5일 한국전쟁의 설계자였던 스탈린이 뇌출혈로 사망했다. 그의 사망은 곧 전쟁 종식을 의미했다. 스탈린 사망 이후 정전회담은 급물살을 타고 진행됐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휴전을 고려해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수립한 대한정책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군의 강화를 계속한다. 둘째, 한국의 안보와 관련해 현재 필리핀·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와 맺고 있는 조약과 유사한 조약을 한국에 보장한다. 셋째, 유엔기구를 통해 한국 정부의 민주적 제도를 발전시키며, 한국의 경제적 복구와 재건을 위해 원조를 계속한다. 넷째, 통일·독립·민주적인 한국 정부 수립을 위해 유엔대표단을 설치한다. 다섯째, 정치회담에서는 한국문제만을 논의한다. 여섯째, 위기상황에 맞춰 정치회담에서 미국의 지위를 강화한다.

이처럼 미국의 대한정책은 한반도에 미군을 유지하고 한국 방위를 위해 한국군 증강을 약속함으로써 기존 미군 철수를 전제로 했던 한국군 증강정책에 대해 수정을 가했다.


<남정옥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국방일보-2007.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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