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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17 10:2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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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다시보는 6·25-<47>6·25와 국군 지휘관들
다시보는 6·25 - [군사기획]
<47>6·25와 국군 지휘관들
국군 증편 따라 장군도 대폭 늘어


▲전쟁 이전 지휘관

6·25 발발시 군 장성은 총 13명에 불과했다. 육군이 10명, 해군 1명, 공군이 2명이었다. 당시 최고 계급은 소장(少將)으로 4명이었고 나머지는 준장이었다. 소장은 육군 장군인 총참모장 채병덕 장군을 비롯해 김홍일 육군참모학교장, 신태영 병기행정본부장, 이응준 5사단장뿐이었다. 손원일 해군총참모장과 김정렬 공군총참모장은 준장이었고, 신현준 해병대사령관은 대령이었다.

육군준장으로는 육본작전참모부장 정일권 장군을 비롯해 유재흥 7사단장, 이형근 2사단장, 이준식 육군사관학교장, 송호성 청년방위대 고문단장, 그리고 무보직인 원용덕 장군이었다. 공군에는 초대 국방차관을 역임한 최용덕 준장이 있었다. 예비역은 김석원 육군준장이 유일했으나, 그는 전쟁 초기 수도사단장 임명과 동시 현역에 복귀했다.

당시 국군은 10만 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이를 지휘하는 장관급 지휘관·참모는 그리 많지 않았다. 이는 장군으로 보직돼야 할 사단장과 국방부·육군본부 주요 국장들이 대부분 대령으로 보직됐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북한군은 사단장과 민족보위성 및 총참모부 국장들이 모두 장성들로 편성돼 있었다.

그렇지만 국군은 전쟁직전 장군으로 보직될 8개의 사단 중 3명만이 장군이었고 5명은 대령이었다. 대령이 사단장을 하는 사단에는 3개 보병연대장과 사단참모장이 모두 사단장과 같은 대령이었다. 따라서 직책상 이를 차별하기 위해 사단장에게는 계급이 대령이지만 ‘사단장 각하’라는 호칭을 사용했고, 암묵적으로 부사단장을 ‘부각하’라 불렀다.

▲6·25와 지휘관

6·25 때 군 수뇌부는 국방장관과 각군 총참모장이었다. 당시 군령권을 지닌 합참의장은 직제상 없었으나 그 기능은 육군총참모장이 수행했다. 육군총참모장의 3군 통제에 대한 근거는 전쟁 초기 이뤄졌다. 이승만 대통령은 패장 채병덕 장군 후임에 정일권 소장을 육군총참모장에 임명하면서 육·해·공군 총사령관 직책을 부여해 3군을 통제케 했다.

이후 이대통령은 백선엽 육군총참모장을 국군 최초의 대장으로 진급시켜 이를 유지했다. 이런 제도적 틀 속에서 육군 장군 수는 크게 늘었다. 하지만 북한은 전쟁 이전부터 민족보위상·전선사령관이 대장, 총참모장·군단장은 중장이었다. 전쟁 중 김일성은 ‘인민군 원수(元帥)’가 됐다. 이것만 봐도 북한 남침의 단면을 알 수 있다.

6·25는 국군 증편과 함께 이에 비례해 장군의 양적 팽창도 이뤄졌다. 전쟁 이전 불과 13명이던 장성 수가 전쟁을 통해 약 다섯 배가 됐다. 이는 전쟁을 수행하면서 참모차장제 신설과 장군 보직, 3개 군단 창설에 따른 군단장과 참모장의 장군 보직, 그리고 국방부와 육본국장을 모두 장군으로 보직했기 때문이다.

특히 인천상륙작전을 전후해 사단장이 장군으로 보직됨에 따라 미군과 북한군과의 ‘위계상의 동등한 체제’를 유지하게 됐다. 전쟁 초부터 미군과 북한군 사단장은 소장이었다. 육군총참모장도 전쟁 중 중장과 대장으로 상향 조정됐다. 군단장도 준장에서 소장·중장으로 정착됐다.

전쟁 동안 육군총참모장 4명, 군단장 6명, 사단장 약 50명이 배출됐다. 이는 독일 프로이센군이 나폴레옹 전쟁을 통해 성장했듯이, 국군지휘관도 6·25를 통해 양적·질적 성장을 했다. 그뿐만 아니라 6·25는 버거운 직책과 무거운 책임에 비해 경험이 부족하고 나이가 적은 국군지휘관의 리더십을 크게 향상시킨 ‘전쟁학 강의’ 그 자체였다.


<남정옥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국방일보-2007.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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