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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07 10: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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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다시보는 6·25-<50>미 해병대의 장진호 전투
<50>미 해병대의 장진호 전투
다시보는 6·25 - [군사기획]
<50>미 해병대의 장진호 전투
또다른 해병대 신화 낳은 세계 2대 동계전투

▲미 해병대의 참전 배경

미 해병대의 한국전 참전은 인천상륙작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미 해병대의 존재가치는 태평양전쟁을 통해 부각됐다. 태평양전쟁 시 본토 사수를 외치던 일본군의 전쟁 의지를 말살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미 해병대가 해냈다. 미 해병대는 총사령관 맥아더의 작전개념에 따라 서남태평 상의 전략적 섬들을 하나씩 점령하며 일본 본토를 향해 무섭게 돌진했다.

미 해병대는 이오지마에서 해병군단 작전을 통해 일본군을 궤멸시켜 일본의 전의를 상실케 했다. 그 결과 맥아더는 해병대의 전투능력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며 무한한 신뢰와 애정을 보냈고 이를 잊지 않고 있었다.미 해병대와 맥아더의 인연은 한국전 발발로 다시 이어졌다. 전쟁 초기 한국전선을 시찰하며 상륙작전을 구상했던 맥아더의 뇌리에는 태평양전쟁 시 한 번도 실망시키지 않았던 해병대가 각인돼 있었다.

6·25전쟁 초기 맥아더의 최초 상륙계획인 블루하트(Blue Heart)작전은 미 1기병 사단과 1개 해병연대전투단을 주축으로 1950년 7월 22일 인천에서 실시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북한군의 남진 속도가 예상 외로 빠르게 진행되면서 맥아더는 이를 9월로 연기했다. 그러나 장차 상륙작전을 위해 연대전투단 규모의 해병대가 미 본토에서 먼저 한국전선으로 출동했다. 최초 미 해병대는 상륙작전과 무관한 낙동강 전선의 지상작전에 투입돼 미 8군의 전략 예비 역할을 했다.

한국 해병대가 통영상륙작전에서 귀신 잡는 해병 신화를 이룩했을 때, 미 해병대는 낙동강 돌출부에서 김일성에게서 ‘서울사단 칭호를 받은 북한군 4사단’을 재기 불능의 상태로 만들며 새로운 해병 신화를 창조했다. 이후 미 해병대는 인천상륙작전에 이어 원산에 상륙해 동부전선에서 미 10군단의 주공으로 활약 중 장진호에서 중공군 2차 공세를 맞아 ‘후방으로의 공격’이라는 또 다른 해병 신화를 낳았다.

▲장진호 철수작전

미 해병대의 장진호 전투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스탈린그라드전투와 함께 세계 2대 동계전투로 유명하다. 스탈린그라드전투에서 히틀러는 소련군에게 포위된 독일 제6군의 항복을 막기 위해 파울루스 사령관을 원수로 승진시켜 항복불가 입장을 강력 지시했으나, 전세의 불리를 느낀 파울루스는 히틀러의 ‘애원에 가까운 선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항복했다.

히틀러는 원수(元帥)는 자결하되 결코 항복하지 않는다는 역사상 전례를 들어 그러한 조치를 취했으나 배신감만 느꼈다. 하지만 장진호전투에서 미 해병사단은 영하 40도의 혹한 속에서 사상자와 편제장비를 그대로 유지한 채 중공군 9병단(12개 사단)의 집중 포위를 돌파했을 뿐만 아니라 추격해 오는 중공군에게 막대한 타격을 줘 재기 불능케 했다.

스미스 장군이 지휘하는 미 해병1사단은 맥아더의 크리스마스 공세의 작전개념에 따라 50년 11월 28일 서부전선의 미 8군과 대치하고 있는 중공군의 배후를 공격해 그들을 격멸하고 압록강으로 진격하기 위해 장진호 서쪽의 유담리에서 강계∼만포진 쪽으로 공격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중공군 9병단이 하루 먼저 장진호 일대에 주둔한 미군을 공격함으로써 2주간의 사투가 시작됐다. 중공군은 5배가 넘는 병력으로 미 해병사단을 일거에 섬멸해 흥남으로 진출코자 했으나 오히려 막대한 피해만 입은 채 그 후 3개월간 전선에 복귀하지 못했다. 이 전투는 중공군의 함흥 진출을 2주간이나 지연시켜 유엔군의 흥남철수작전을 가능케 했다.


<남정옥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국방일보-2008.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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