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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09 15: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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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다시보는 6·25-<26>이승만 대통령의 전쟁 지도
다시보는 6•25 - [군사기획]
<26>이승만 대통령의 전쟁 지도

미국 참전 이끌어낸 전쟁지도력 발휘


▲전쟁지도자로서 이승만에 대한 평가

이승만은 건국 대통령으로서 임진왜란 이후 민족 최대의 위기를 극복하고 국권을 수호한 국가지도자다. 이승만과 함께 전쟁터를 누볐던 장성들은 그를 훌륭한 영도자 및 반공지도자로 평가하고 있다. 국군 최초의 대장인 백선엽 장군은 6•25전쟁을 이승만이 아닌 다른 영도자 밑에서 맞았다고 해도 그보다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엔군사령관 클라크 장군도 그를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반공지도자라고 했다. 미8군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은 그를 위대한 애국자•강력한 지도자•자기 체중만큼의 다이아몬드에 해당하는 가치를 지닌 인물이라고 했다. 테일러 장군도 그와 같은 지도자가 베트남에 있었다면 베트남은 공산군에 패망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그의 영도력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승만 대통령의 전쟁목표와 전쟁수행

그러면 이들 장군들은 왜 이렇게 이승만을 다투어 칭송할까. 그것은 그가 전쟁을 통해 자유 대한민국을 수호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과 상호방위조약을 통해 한미동맹을 결성했고, 국군을 70만 대군으로 성장시켜 한국 안보를 견실하게 한 공로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6•25 때 이승만이 내건 슬로건은 북진통일이었고, 그의 전쟁지도는 전쟁 당일부터 치밀하게 전개됐다.

그는 개전 첫날 무초 주한 미 대사를 만나 6•25가 ‘제2의 사라예보’가 돼서도 안되겠지만 통일을 위한 절호의 기회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미 전쟁 당일부터 미국 참전과 북진통일을 전쟁목표로 삼고 매진했다.이승만은 미국의 참전만이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를 위해 그는 미 대사와 긴밀한 접촉을 유지하면서 극동군사령관과 주한국 대사에게는 한국군에 필요한 무기와 탄약을 요청함으로써 미국이 참전할 때까지 버텨 나갔다.

미군 참전 이후 그는 도움을 주고 있는 미국에 오히려 큰소리를 치면서 전쟁을 수행했다. 이는 그의 카리스마적인 지도력, 미국 최고 명문대를 졸업한 학문적 배경, 국제 정세를 읽고 판단하는 뛰어난 통찰력에서 나왔다. 전쟁 동안 이승만에게 이러한 전쟁목표가 없었다면 한국도 베트남 전쟁에서 ‘자유월남’처럼 공산화됐을 것이다.

그는 불리한 상황에서도 오로지 국가 이익만을 생각하고 행동했다. 반공포로 석방은 그 좋은 실예가 될 것이다. 미국이 고분고분하지 않는 이승만을 제거할 계획까지 수립했으면서도 그를 그대로 둔 것은 한국에 그만한 리더십을 갖춘 반공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6•25라는 국가적 위기를 오히려 호기로 판단하고 전쟁을 지도했다.

그는 생애 마지막 기회가 될 북진통일을 위해 80세를 바라보는 노령에도 불구하고 전후방 부대를 방문해 장병들을 격려하고 전 국민을 동원해 총력전을 전개했다. 전쟁 동안 그는 미국의 이익이 어디에 있는지를 미국보다 먼저 깨닫고 행동했다.

그는 휴전에 임박해서는 제2의 6•25를 방지하고자 한미상호방위조약과 한국군 전력 증강 등 ‘안보 전리품’을 미국으로부터 당당하게 받아냈다. 휴전 이후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그가 미국에 휴전을 양보하는 대신 미리 전쟁억지력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의 통수권 차원에서 나온 전략적 혜안(慧眼)이 위기에 빠진 한국을 구했던 것이다.

<남정옥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국방일보-2007.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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