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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27 17:4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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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다시보는 6·25 - <29>육군참모총장 채병덕 장군의 공과(功過)
다시보는 6•25 - [군사기획]
<29>육군참모총장 채병덕 장군의 공과(功過)

건군 과정 많은 업적 불구 ‘패장’ 평가


▲채병덕 장군의 전사

6•25전쟁 발발 이후 국군의 첫 장군 전사자는 육군참모총장을 두 차례나 지낸 채병덕 육군소장이다. 그는 평양 태생으로 일본 육사를 나와 인천에서 소령으로 근무할 때 광복을 맞았다. 이어 그는 건군에 참여해 1연대장과 4여단장, 그리고 국군참모총장(합참의장 해당)을 거쳐 육군참모총장(2대)이 됐으나 일본 육사 선배 김석원 준장과의 불화로 1949년 10월 예편됐다.

그러나 그는 다시 군에 복귀해 참모총장(4대)에 전격 기용돼 6•25 초기 작전을 지도했다. 하지만 그는 4일 만의 서울 함락, 한강교 폭파로 인한 인명과 장비 상실, 서울 북방의 국군부대 철수 지연에 따라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자 총장에서 해임됐다.

그 후 한직인 영남편성관구사령관이 된 그는 경남 하동에서 미29연대 3대대의 하동방어를 지원하기 위해 3대대 지휘부와 지형정찰 중 하동고개에서 북한군의 기습을 받아 머리에 관통상을 입고 현장에서 사망했다. 그날이 바로 50년 7월 27일로 그의 나이 향년 36세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로를 기려 육군중장으로 추서했다.

▲채병덕 장군의 역사 평가

전쟁 초기 육군총수로서 작전을 총지휘했던 채병덕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이다. 먼저, 그가 아니고 누가 총장을 했어도 그랬을 것이라는 동정론 내지는 옹호론이다. 이승만도 ‘제갈량이 국무총리였어도 공산군의 대포와 전차를 막을 수 없었을 것’이라며 두둔했다. 당시 한국 정부 능력으로는 현대전을 지도하고 수행할 수 있는 전쟁지도 능력이 축적되지 않은 상태에서 남침당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채총장의 작전 실패에 대한 비판 또한 만만치 않다. 이를 주장하는 측은 그가 서울이 피탈될 때까지 의정부 전선을 7차례나 방문하는 등 전쟁 전반에 따른 작전지도보다 일부 전선에 국한된 작전지도로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우’를 범했다는 것이다. 그는 전반적인 전황을 파악하고 이에 맞는 지휘조치를 내리지 못했다.

그의 대표적 작전 실패는 한강 이북에 5개 사단을 방치한 채 단행한 한강교 폭파와 국군의 능력을 무시한 의정부 반격, 그리고 육사생도들의 전선 투입이다.채총장 밑에서 작전국장을 지낸 강문봉 장군은 “그의 군사전문지식 결여와 작전지휘관으로서의 전술 능력 부족이 그를 패장으로 이끌었다”고 평했다.

미 군사고문관도 “그는 한국전과 같은 미증유의 전쟁을 감당하기에 부족했다. 막강한 탱크를 앞세우고 황무지를 달리듯 내려오는 북한군을 막기는 어렵겠지만 그렇다고 이것만은 잘했다고 할 만한 업적을 남기지 못했다”고 혹평했다.채병덕이 건군 과정의 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패장으로 평가받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는 임진왜란 때 신립이 훌륭한 장수임에도 나라의 운명을 건 충주전투 패배로 패장이 된 것과 마찬가지다. 예로부터 역사인물에 대한 포폄(褒貶), 즉 칭찬과 비판에 대해서는 사기(史記)나 조선왕조실록도 매우 엄정했다. 채병덕이 이런 평가를 받는 것은 한국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인물이기 때문이다.

그의 평가는 건군 과정의 공로와 최후까지 멸사봉공의 자세로 임하다가 전사한 점은 높이 평가하되, 전쟁 초기 작전 실패는 후세의 경계로 삼아야 할 것이다. ‘거울에 비추어 경계로 삼는다’는 감계(鑑戒) 정신이 역사의 으뜸 덕목이 된 것도 이 때문이 아니겠는가.

<남정옥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국방일보-2007.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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