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림마당-언론보도
글번호
i_47000000000495
일 자
2007.08.27 17:53:10
조회수
3085
글쓴이
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다시보는 6·25 -<32> 김성은 부대의 통영상륙작전과 귀신 잡는 해병
다시보는 6•25 - [군사기획]
<32>김성은 부대의 통영상륙작전과 귀신 잡는 해병

한국 첫 상륙작전 감행 통영 탈환


6•25전쟁 때 해병대는 일천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귀신 잡는 해병’ 또는 ‘무적의 해병’으로 용맹을 떨쳤다. 해병대는 1948년 여순 10•19사건 이후 상륙작전의 필요성에 따라 창설됐다. 이는 여순사건 진압 차 함대를 이끌고 출동한 신현준 중령이 “상륙군 없이 반란군을 완전 진압할 수 없다”는 보고를 받은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의 지시에 의해 이뤄졌다.

해병대는 49년 4월 15일 진해에서 창설돼 사령관에 신현준 대령, 참모장에 김성은 중령이 임명됐다. 창설 직후 해병대는 공비토벌작전에 투입됐다. 토벌지휘관에는 김성은 중령이 임명돼 지리산에 근거한 진주일대의 공비를 소탕했다. 또 49년 12월 29일에는 진주에서 제주도로 이동해 한라산 일대의 공비를 토벌했다. 6•25 발발시 해병대가 제주도에 주둔한 것도 이 때문이다.

당시 해병대는 2개 부대(제주읍•모슬포부대)의 1166명으로 편성된 연대규모였다.그렇지만 해병대는 6•25를 거치며 장족의 발전을 했다. 그 과정에서 신현준 장군과 김성은 장군의 업적이 돋보였다. 신장군이 해병대 초석의 디딤돌을 놓았다면 김장군은 전투를 통해 해병혼의 전통을 수립했다. 이런 점에서 김장군이 해병대에 미친 영향은 지대했다.

그가 29세에 장군에 진급하고 39세에 최연소 국방장관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6•25는 해병대를 용맹의 상징으로 부각시켰다. 개전 초기 해병대는 육군에 배속되어 지연작전을 수행했다. 처음에는 고길훈부대가 이를 수행하다가 후에는 김성은부대가 고길훈부대를 통합해 수행했다.

고길훈부대는 모슬포부대 1대대를 기간으로 편성돼 50년 7월 15일 군산에 상륙, 군산•장항•이리지구에서 호남으로 우회 기동하는 북한군 6사단과 교전했다. 이후 고길훈부대는 7월 22일 여수에 상륙한 김성은 중령에게 지휘권을 인계하고 부대도 ‘김성은부대’로 개칭됐다. 김성은부대는 지연작전과 낙동강 방어작전에 참전해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김성은부대는 지연작전 시 ‘민(閔)부대’에 배속돼 남원과 함양에서 적을 격퇴했고, 이후 미27연대에 배속돼 진주방어에 가담했다. 낙동강 방어작전 시 김성은부대는 마산 서쪽 진동리에서 북한군 6사단의 정찰대대를 기습 공격했고, 미25사단의 반격작전 때는 진동리 ~ 마산 간 보급로를 타개하고 서북산 일대의 적을 격퇴해 낙동강 서부방어선 구축에 크게 기여했다.

해병대의 위상을 높이게 된 결정적인 전투는 김성은부대가 수행한 통영상륙작전이다. 북한군 7사단이 전략적 요충지 마산과 진해를 해상봉쇄하기 위해 통영을 점령하자, 해군본부는 이의 탈환임무를 김성은부대에 부여했다. 김성은부대는 8월 17일 통영 해안에 한국 최초의 상륙작전을 감행해 통영을 탈환하고, 적의 유일한 공격로인 원문고개를 조기에 확보해 낙동강 서측방의 위협을 제거했다.

김성은부대의 신속한 작전을 본 외신기자들이 “귀신도 잡을 만큼 놀라운 일을 해냈다”고 보도함으로써 해병대는 일약 ‘귀신 잡는 해병’의 명성을 얻게 됐다. 그 결과 해병대는 미군의 인정을 받아 인천상륙작전 참가는 물론이고 향후 해병대 발전의 견인차가 됐다. 지모와 용맹으로 귀신 잡는 해병의 전통과 짧은 시간에 세계 최강의 해병으로 발전시킨 김성은 장군의 공로는 해병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남정옥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국방일보-2007.08.20]

첨부파일 첨부파일이 없습니다.
수정 삭제
목록으로
다음글 [국방일보]다시보는 6·25 -<33>미군의 한반도 전개 양상과 특징
이전글 [중앙일보]해외 항일의병 `본거지`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