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림마당-언론보도
글번호
i_47000000000496
일 자
2007.08.27 17:53:42
조회수
2556
글쓴이
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다시보는 6·25 -<33>미군의 한반도 전개 양상과 특징
다시보는 6•25 - [군사기획]
<33>미군의 한반도 전개 양상과 특징

주일미군 먼저 투입 지연작전 전개


▲한반도 전개 당시 상황

6•25전쟁시 미국은 제1•2차 세계대전과 달리 전혀 준비가 돼 있지 않은 상태에서 전쟁을 맞이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전쟁계획에 상정되지 않은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나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당시 미국의 대소 전쟁계획이나 극동군사령부의 작전계획에는 한국에 관한 계획이 없었고, 재래식 전쟁에 대비한 준비가 불충분한 상태에서 미국은 전쟁에 직면했다.

그 때문에 미군은 오늘날 한반도 위기발생시 적용되는 미 본토 증원병력의 전개에 필요한 시차별 부대전개제원(TPFDD)이나 연합전시증원(RSOI)과 같은 계획적인 전개를 할 수 없었다. 특히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 상황은 미군의 원활한 전개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미국은 개전 4일째 수도서울이 함락되고 국군의 절반이 조기에 상실되는 등 전황이 극도로 불리하게 전개되는 백척간두의 긴박한 상황 속에서 부족한 병력을 마치 구두끈을 졸라매듯 차출해 위기에 빠진 한국에 파견할 수밖에 없었다.

▲한반도 전개 양상과 규모

개전 초기 미군은 빠른 속도로 남진하는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해 완전히 전투편성을 갖춘 부대보다 다소 전투력이 떨어진 부대라도 신속히 전개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에 한국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주일미군이 먼저 투입돼 지연작전을 전개했고, 이후 해외기지와 본토 증원 병력이 전선에 투입돼 부산교두보를 지탱했다. 또 인천상륙작전 후 전쟁 종결을 위해 일본에 남아 있던 1개 사단까지 한국전선에 투입했다.

중공군 개입 이후 유엔군과 공산군이 완전한 군사적 승리에 막대한 희생이 필요하다고 느끼면서 전개된 휴전협상 기간에 미군은 새로 마련한 순환근무제도에 따라 최초 전개된 주일미군 사단을 주방위군(National Guard) 사단으로 교대했다. 순환근무제도는 그동안 전투피로도와 장기간 전선에 투입된 부대와 개인을 교대시키기 위한 제도였다.

이렇듯 6•25때 미 지상군의 한반도 전개는 4단계로 이루어졌다. 1950년 7월 지연작전 동안 주일미군 3개 사단과 8군사령부가 한국에 최초로 전개됐고, 8월 낙동강 방어작전 간에는 미 본토와 해외기지(하와이•오키나와)에서 5연대전투단•29연대•1임시해병여단•2사단이 전개됐다. 인천상륙작전과 북진작전 때에는 7사단•1해병사단•3사단•187공수연대전투단이 전개됐다.

마지막으로 51년 12월~52년 1월 사이에는 일본방위를 위해 전개된 주방위군 2개 사단(40사단•45사단)이 최초 투입된 주일미군 2개 사단과 교대해 한국전선에 투입됐다. 그 결과 미군은 항공모함 16척과 항공기 1536대를 비롯해 1개 야전군, 3개 군단, 9개 전투사단을 한반도에 투입했다. 이는 전쟁 초기 맥아더가 합참에 요구한 전력과 비슷했다.미국은 ‘본토 병력의 증원이 먼저냐 북한의 부산 점령이 먼저냐’의 시간 싸움에서 이겼다.

미군의 신속한 전개는 한국을 위기에서 구출했다. 한국전에서 흘린 미군의 값진 피는 한국의 공산화를 막는 데 기여했고, 나아가 자유민주주의 수호와 자유진영의 결속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미군의 한반도 전개는 개전 초부터 한미 연합전선 형성의 기틀을 마련했고, 전쟁을 통해 한국군을 현대화한 군으로 발전시켰으며 전후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바탕으로 주한미군이 주둔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하는 등 한미동맹의 초석이 됐다.

<남정옥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

[국방일보-2007.08.27]

첨부파일 첨부파일이 없습니다.
수정 삭제
목록으로
다음글 [국방일보]다시보는 6·25 -<34>북한군 포로획득과 전투서열 작성
이전글 [국방일보]다시보는 6·25 -<32> 김성은 부대의 통영상륙작전과 귀신 잡는 해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