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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04 14: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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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다시보는 6·25 -<34>북한군 포로획득과 전투서열 작성
다시보는 6•25 - [군사기획]
<34>북한군 포로획득과 전투서열 작성

포로는 곧 정보… 인천상륙후 정보량 급증


▲전쟁 이전 대북 정보수집의 한계

6•25 발발 당시 국군이나 미군은 공히 북한군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다. 북한군의 전투력 증강과 남침 위협에 관한 정보는 있었으나 실제 전투에 중요한 북한군의 전투서열 등의 전투정보는 없었다. 한국은 그렇다 치고 미국의 CIA 등 정보기관이 속수무책이었던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1948년 9월 북한에 친소공산정권이 수립되고, 49년 중국에 모택동의 공산정권이 수립됨으로써 국교가 단절돼 이들 지역에 대한 정보 수집이 원천적으로 봉쇄됐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의 정보 수집 수단은 주로 인간정보와 통신정보(감청•전파탐지)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 결과 전쟁 초기 국군과 미군은 적에 대해서는 눈먼 장님이었다. 북한군의 지휘구조, 부대 편성과 규모, 전투능력, 병력배치, 무기•장비 등을 알 수 있는 적 전투서열이 작성되지 않은 채 교전했기 때문이다. 이는 적의 실체를 모르고 싸우는 것과 같았다.

▲북한군 전투서열 작성 경위와 활용

미극동군사령부로서는 북한군 전투서열의 작성이 급선무였다. 이를 위해 미군은 북한군 포로와 귀순자를 통해 북한군의 편성과 지휘체계를 그림 퍼즐 맞춰 나가듯 작성했다. 포로와 귀순자는 중요한 정보원이었으나 개전 초기에는 그리 많지 않았다. 50년 7월까지 북한군 포로는 39명에 불과하다가 8월 말에 이르러서야 그 수가 1745명에 달했다.

극동군사령부 정보참모부가 활기를 띤 것도 이때부터다. 인천상륙과 북진을 거치며 포로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50년 12월 말 북한군 포로는 약 13만6000명에 달했다. 또 낙동강 전선에서 패색이 짙어갈 무렵 북한군 고급간부(사단참모장•연대장)의 귀순도 이어졌다. 북한군 13사단 연대작전장교 김성준 소좌의 9월공세 정보는 대표적이다.

극동군사령부는 이들 포로와 귀순자의 심문을 통해 아군에 필요한 정보를 수집했다. 이들은 북한군 규모와 명칭 등 단순 정보에서부터 차후 작전계획 등 중요 정보를 제공했다. 이를 토대로 미극동군사령부 정보참모부 전투서열과는 50년 10월 15일 1차로 ‘북한군 전투서열’을 편찬해 야전지휘관과 정보요원의 작전용 기밀자료로 활용하게 했다.

또 극동군사령부는 사령부 일일정보 개요와 추가 획득된 포로를 통해 이를 보완해 나갔다. 이렇게 해서 51년 북한군 전투서열 증보판이 출판됐다. 북한군 전투서열은 적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수록하고 있었다. 북한군 창군과정, 전쟁 이전 중공군의 북한군 편입일자와 규모, 북한군 제대별(총사령부~중대) 편성과 지휘관 인적사항을 담고 있다.

또 극동군사령부는 중공군이 개입한 직후인 51년 12월 29일 ‘중공군전투서열’을 작성해 활용하게 했다. 여기에는 참전한 중공군의 규모와 편성, 지휘관 인적사항이 정확하게 수록됐다. 미군은 포로 이외에도 감청 및 전파 장비를 이용해 적의 이동과 지원 등의 정보를 수집했다.무릇 모든 전쟁이 그렇듯 6•25도 눈에 보이지 않는 정보전이 전개됐다.

맥아더 장군이 7월 8일 천안전투 때까지 적의 규모와 능력을 오판했던 것도 정보가 없었기 때문이고, 8군사령관 워커 장군이 낙동강전선에서 과감한 역습을 못했던 것도 정보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유엔군은 적 전투서열을 작성하고서야 비로소 ‘적의 실체를 알고 싸우는 전쟁’을 하게 됐고 이를 통해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됐다.

<남정옥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국방일보-2007.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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