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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14 16: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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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다시보는 6·25 -<17>전쟁 직전 38도선상의 군사적 마찰
다시보는 6·25 - [군사기획]
<17>전쟁 직전 38도선상의 군사적 마찰

북한 대규모 병력 동원 분쟁 격화


▲38도선의 상황

광복 후 남북한에 미소 군이 진주한 이후에도 한동안 주민들은 여러 가지 목적에서 서로 38선을 넘어 남북을 왕래할 수 있었다. 점차 시간이 지남에 따라 38선 접경지역은 군사적으로 통제됐지만 당시 경비초소도 간선도로변에 띄엄띄엄 설치한 것이 고작인 수준이었다.

그러나 1948년 정부 수립을 전후해 38선 접경지에서는 약탈·납치·보복 등의 이질적 체제에서 오는 대항의식과 경쟁심·적대감이 가열되고 있었다. 국군도 뒤늦게 소련군과 북한군의 경계에 대응해 게릴라 침투와 민간인의 월경을 막기 위해 경비초소를 강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38도선상의 무력충돌은 49년 3월 중순에 접어들면서부터 격화되기 시작했다. 그 대부분은 경비대간에 발생한 소규모 충돌이었지만 어떤 경우에는 정규군 보병대대 규모로 확대된 적도 있었다. 충돌이 격화된 원인은 북한이 대규모 병력을 동원했기 때문이었다. 북한은 이미 소련군으로부터 38도선 경비임무를 인수해 북한 경비대가 경비를 맡아왔고 49년부터는 이미 그 규모를 확대해 전술상의 요지를 장악, 강력한 진지를 구축했다.

▲개성의 육탄 10용사

38도선 접경지의 분쟁 가능성이 점증되는 상황에서 주한미군의 철수는 북한군의 도발을 자극할 가능성이 높았다. 미군 철수를 반대해 온 한국 정부는 주한 미국대사로부터 미국의 군사지원을 약속받고서야 철수에 동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한미군의 철수 예정이 국내에 알려지자 안보 불안감이 점증되고 남침 위기감이 사회 전반에 확산됐다.

남침 위기설과 대북 강경대응 입장이 집중적으로 표명되던 49년 5월 초, 개성·옹진·춘천을 비롯한 여러 38선 접경지에서 전투가 발발했다. 특히 개성지역에서 벌어진 전투는 무초대사에 의하면, 대단히 심각한 위기상황이었다. 이 전투는 개성 북서쪽의 292고지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이 지역 방어를 담당한 국군이 북한군의 진지 앞에 방어진지를 구축하자 북한군이 이를 저지할 목적으로 공격을 가하면서 시작됐다.

북한군의 대규모 공격을 받은 국군 제1사단 제11연대는 292고지뿐만 아니라 그 남쪽의 유엔고지·비둘기고지마저 빼앗겼다. 이로 인해 개성마저 위협받게 되자 제11연대장은 즉시 1개 대대를 증원함과 동시에 훈련 중인 하사관교육대를 개성으로 복귀시켜 반격할 태세를 갖췄다.

다음날 특공대로 자원한 10명의 용사들이 포병의 지원사격 하에 비둘기 고지로 돌진했지만 북한군의 토치카에서 뿜어져 나온 기관총 사격 때문에 목표지점으로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하여 특공대원들은 북한군의 기관총 진지로 박격포탄을 들고 돌입, 장렬하게 자폭함으로써 마침내 목표물들을 파괴하는 데 성공했다. 뒤이어 후속 지원된 하사관교육대 병력이 비둘기 고지를 탈환했으며 곧이어 292고지도 무난히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이를 계기로 개성 부근 전투는 북한이 다시 옹진지역을 공격함으로써 크게 확대됐고 그 상황은 전쟁을 방불케 했다. 이러한 상황 뒤에서 북한은 비밀리에 전면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양영조 군사편찬연구소 전쟁사1팀장>

[국방일보-2007.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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