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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28 16: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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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다시보는 6·25 -<20>공산군 포로들의 수용소 폭동사건
다시보는 6·25 - [군사기획]
<20>공산군 포로들의 수용소 폭동 사건

北 파견 공작원들 포로 장악 배후 조종


▲공산군 포로들의 폭동

판문점에서 협상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는 불미한 사건이 많이 발생하고 있었다. 공산군은 의도적으로 포로수용소에 공작원들을 침투시켜 포로들을 조직화하고, 공산군 휴전회담 대표들에게 정보를 제공했다.거제도 포로수용소에는 북한군 13만 명과 중공군 2만 명, 도합 15만 명의 포로가 수용돼 있었다.

수용소에서는 반공 포로들과 친공 포로들로 나뉘어 수용소 내 주도권 장악을 위해 세력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이러한 상황에서 송환 희망 포로 수를 결정하기 위한 포로 조사가 진행됐고, 제62동 수용소를 장악하고 있던 친공 포로들이 조사를 방해했다. 조사팀이 진입했을 때 친공 포로들로부터 공격을 받았고 그로 인해 미군 1명이 사망하고 38명이 부상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때 포로들은 77명이 사망하고 140명이 부상했다.판문점 공산군 측 대표단은 이 사건에 대해 즉각 “수많은 우리 인원을 야만적으로 학살한 유혈사건”이라며 항의했고, 분명 이 사건은 유엔군 대표단에 불리하게 작용했다. 미8군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은 돗드 준장을 신임 수용소장으로 임명해 수용소 내 규율을 확립토록 했으나 폭동·사건이 여전히 끊이지 않고 있었다.

▲돗드 포로수용소장의 납치

이처럼 회담 기간 내에 많은 사건이 발생하고 있었지만, 그중 가장 눈에 띄는 전대미문의 사건은 바로 포로수용소장이 친공 포로들에게 납치된 사건이었다.이 사건은 1952년 5월 7일 수용소장 돗드 준장이 제76수용소 출입구에서 포로대표와 면담 중 포로들에게 납치돼 인질로 수용소 안으로 끌려 들어간 것이다. 포로들의 사전 계획에 따른 올가미에 걸린 것이었다.

당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는 북한 공작원들이 계획적으로 투항해 수용소 내로 침투해 오는 경우가 빈번했다. 그들은 주로 북한군 정치보위부 소속으로 수용소 내 대원을 훈련시키고 판문점 공산군 휴전회담 대표들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들은 수용소에 침투해 친공 포로 조직을 결성했고 포로수용소 내 병원 등의 시설을 이용해 첩보를 교환했다.

수용소 내에는 북에서 파견된 공작원들이 포로들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배후에서만 활동하고 신분을 숨기고 있었다. 이들의 최고 지휘관은 북한 장교수용소 제66수용소의 이학구 총좌(대령)였다.돗드 소장을 납치한 친공 포로들은 자신들이 작성한 사항들을 요구했다. 그들의 최초 요구는 막사 간 전화시설을 갖추고 포로 조직을 인정하라는 것 등 7개항이었다.

이에 미8군사령관은 회유와 아울러 무력 진압도 불사하겠다는 강경한 경고를 통해 돗드 소장을 구출했으나 포로수용소장의 납치사건이 휴전회담 석상에서 공산군의 좋은 선전무기가 됐다.이와 같이 친공 포로들은 의도적으로 수용소 내에 침투한 공작원의 조종에 따라 휴전협상에서 공산군 대표 입장을 지원하며 유엔군 대표의 입장을 약화시키려는 의도를 갖고 지속적으로 폭동을 일으켰다

[국방일보-2007.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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