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림마당-언론보도
글번호
i_47000000000797
일 자
2011.09.30 16:28:38
조회수
4869
글쓴이
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기획-국난극복사<19> 나당전쟁, 신라의 당 축출

<19>나당전쟁, 신라의 당 축출
[매소성 <경기 연천>·기벌포<충남 장항> 전투서 승리거둬 적 몰아내.. / 2011.09.15]

경기 연천군 청산면에 있는 매소성의 실제모습 사진.

신가라 20만당군을 물리친 매소성 회전 기록화 사진 전쟁기념관 소장.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붕괴시켰다고 해서 삼국통일이 바로 이뤄진 것은 아니다. 당이 백제와 고구려의 옛 영토는 물론이고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신라는 한반도에서 당을 축출하지 않으면 안 됐다. 양국 간의 일대 격전인 ‘나당전쟁’이 불가피해 보였다.


 연합군에서 적으로 돌아서다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를 세운 당은 신라에도 계림도독부를 세우고 문무왕을 계림주대도독으로 삼았다. 이른바 ‘취리산(就利山) 회맹’의 결과였다.

당은 당장(唐將)을 통치 책임자로 삼고, 주나 현의 책임자도 당인으로 임명했다. 점령지엔 승려를 대거 보내 선무공작을 폈다. 그리고 평양에는 안동도호부를 세워(668)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 했다.

당 고종은 김춘추와 그의 아버지(태종 이세민)가 맺은 협정을 정면으로 외면했다. 신라로서는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신라는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 대신 일면 외교 일면 항전으로 임했다.

백제·고구려 유민의 부흥운동을 뒤에서 후원하는 형식으로 항전을 시작했다. 669년 흠순(欽純)과 양도(良圖)를 사죄사로 당에 파견했고, 급찬 기진산을 보내 두 상자의 자석을 바쳤다. 그해 겨울에는 노(弩)의 기술자 구진천(仇珍川)도 입당시켰다. 그의 입당은 위험천만한 일이었지만 구진천은 고종 위협에도 노 제작법을 다 드러내지 않았다. 이 일로 당은 신라에게 고압적으로 나왔다.


 신라, 드디어 당군을 공격하다

 670년 3월 신라 장군 설오유와 고구려 부흥군의 고연무가 각각 1만의 군사로 압록강을 건너 당군을 공격했다. 나당전쟁의 개시였다. 이때 고구려 왕족 안승이 귀순해 왔다.

신라 정부는 그를 고구려 왕(보덕왕)으로 삼아 금마저(익산)로 보냈다. 7월 품일(品日) 장군이 거느린 신라군은 당군과 부여융의 백제군이 웅거한 82성을 공취했다. 671년에는 사비성을 함락시켜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해 백제 전 지역을 지배하게 됐다.

 때마침 서역에서 토번(티베트)이 당을 침공했다. 신라는 이를 한반도에서 당을 몰아낼 절호의 찬스로 여겼다. 더욱이 당의 안동도호부가 요동으로 이동한 뒤라서 평양의 당군 세력도 약해진 상태였다. 638년 ‘거지떼 군대’ 토번군의 침공으로 곤욕을 치른 바 있는 당이 서쪽 변경에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신라로서는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나당전쟁은 당군의 보급상황을 반전시켰다. 신라는 당군에 더 이상 군량을 지원하지 않았다. 당군의 보급 사정은 문자 그대로 악화일로였다. 요동 지역의 고구려 산성들은 여전히 당에 위협적이었다. 게다가 육로 보급선은 너무 신장돼 있었다. 648년의 고구려 원정 때도 이 문제로 곤란을 겪은 당은 결국 해로수송작전을 고려했다. 671년 9월 고간(高侃)이 말갈병 4만을 거느리고 평양을 거쳐 황해도 일대로 공격로를 잡은 것은 실상 이런 사정 때문이었다.


 농성전과 외교전을 병행하다

 안시성에서 출발한 고간의 부대가 평양을 향해 진군했다. 병력이 남진할 때 보급선도 함께 이동했는데, 이를 미리 안 신라군이 하역장소로 갔다. 대동강과 재령강이 합치는 남포 인근의 바다였다. 671년 10월 6일 70여 척의 당선이 도착했다. 신라군이 이를 덮쳤다. 뜻밖의 기습으로 당군은 상당수가 물에 빠져 죽고 낭장 겸이대후(鉗耳大侯)와 병사 100여 명이 포로가 되고 말았다. 고간은 결국 남하를 포기하고 평양 이북으로 퇴각해야 했다. 당군은 약 1년간 공격을 중단했다. 수송작전의 실패 탓이었을 것이다.

 672년 7월 당군이 침공을 재개했다. 고간군 1만과 이근행이 거느린 말갈의 군사 3만이 평양에 집결했다. 그들은 석문(서흥) 주변의 8곳에 나누어 주둔하면서 한시성과 마읍성을 공략한 뒤 백수성에서 500보 떨어진 곳에 진을 쳤다.

신라군과 고구려 부흥군이 이를 공격했다. 기습이었다. 작전은 성공했다. 신라군이 석문까지 당군을 추격했다. 당 기병을 막고자 새로 만든 장창당(長槍幢)의 활약이 컸다. 당군 3000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이내 신라군은 전공을 놓고 분열됐다. 각 부대가 별도로 분산작전을 폈다. 집중력을 상실한 신라군은 결국 효천·의문 등 6명의 장군을 잃고 참패했다. 이때의 패배로 후일 매소성 회전(675)에서 공을 세운 김유신의 아들 원술랑이 생전에 아버지의 진노를 사 시골에 칩거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신라군은 전략을 수정했다. 김유신이 농성전을 제안했다. 기병 중심의 당군에 비해 농민군이 주력인 신라군으로서는 성문을 굳게 닫고 수비하는 것이 최상의 방책이었다.

672년 토번의 사신이 당에 파견돼 두 나라의 관계 또한 호전되던 터라 신라도 변하는 국제정세에 조응했다. 사죄사를 당으로 파견했다. 급찬 원천(原川)이 가는 편에 당군 포로 170여 명도 함께 보냈다. 문무왕은 최대한 몸을 낮췄다. 당 황제에게 보낸 표문은 예를 갖춘 수사로 가득했다.

 그러나 농성전과 외교전이 당장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672년 12월 고간 부대가 백수성에서 고구려 부흥군과 신라군을 격파하고 2000여 명을 사로잡아 갔다. 이근행은 이듬해 윤 5월 호로하(임진강)에서 고구려 부흥군을 격파했다. 당군의 공세는 황해도 우장성에서 강원도 현리의 대양성과 김포의 동자성의 함락으로 이어졌다. 신라의 저항선은 고통스럽고 힘겨웠다.

 전선의 상황은 피아가 마찬가지였다. 당군도 신라의 산성을 하나씩 하나씩 점령하는 동안 지쳤다. 보급의 부담과 병력의 분산, 시간의 지체가 머지않아 침략군을 강타할 조짐이었다. 진군속도가 크게 지체됐다. 농성에 의한 신라군의 지구전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673년 후반, 밀고 밀리던 전선은 교착돼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675년 2월까지 한시적인 평화가 찾아왔다.


신라-당 최후의 결전

 675년 2월, 토번사태가 일단 진정되자 당군이 재침해 왔다. 유인궤가 대군을 이끌고 칠중성을 함락시켰고, 이근행은 매소성을 전진기지로 삼았다. 그 휘하의 말갈군이 해로를 맡았다. 전형적인 수륙양면작전이었다.

 그러나 675년 9월 백수성에서 전세의 향배가 갈렸다. 보급부대인 설인귀 군이 신라의 문순(文順)에게 완패한 것이다. 남포의 악몽이 재현된 듯했다. 당군 1400여 명의 목이 달아났고 40척의 병선이 침탈됐다. 9월 29일, 신라군은 매소성에 맹공을 퍼부었다. 20만 말갈군은 설인귀 부대의 패전 소식에 전의를 상실한 채 매소성에서 퇴각했다. 지난한 ‘나당전쟁’의 끝이 보이는 듯했다.

 신라군에게 승기가 왔다. 백수성의 패전을 딛고 전열을 가다듬은 설인귀가 676년 11월 서해안의 백촌강으로 들어왔다. 상륙은 순조로운 듯했다. 하지만 기벌포(伎伐浦)에서 신라의 사찬 시득(施得)이 이끄는 수군의 감시망에 걸렸다. 양 군대 간의 혈전이 벌어졌다. 22회에 걸친 대접전이었다. 결과는 당군 4000여 급의 목을 벤 신라군의 승리였다.

 기벌포의 패전으로 677년 마침내 당은 안동도호부를 요동의 신성(新城·무순)으로 옮기고 주력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철수시켰다. 이로써 7년여에 걸쳐 70여 회의 격전을 벌인 ‘나당전쟁’이 막을 내렸다.

당을 위협한 토번의 대두가 한반도 전쟁에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당 축출의 결정적인 힘이 신라군의 항전의 결과였음은 결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백기인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첨부파일 첨부파일이 없습니다.
수정 삭제
목록으로
다음글 [국방일보]기획-한국군 세계를 가다<36> 레바논 전쟁과 동명부대
이전글 [국방일보]기획-국난극복사<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