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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30 16:4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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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기획-국난극복사<20>고대 한국의 병학적전통

<20>고대 한국의 병학적 전통
[삼국시대 병법에 능통한 인재 크게 활약 / 2011.09.22 ]
중국의 병서들이 언제 어떻게 수용됐느냐 하는 문제와 상관없이 이미 삼국시대에는 병법의 술(術ㆍart)과 학(學ㆍscience)이 널리 보편화됐다. 무강한 고구려의 전법은 결코 중국의 병법이나 병학의 답습이 아니었다. 그리고 통일신라 때엔 ‘군사학술’이 단지 병학 차원을 넘어서 국가안위를 위한 일종의 ‘안보학’으로까지 자리매김했다.

중국 고서에 보이는 연개소문 모습 사진.

삼실총 공성도 사진.

 한국 병학의 원류와 `고구려 병법'

 고구려가 군사력을 동원해 무력을 과시한 기록은 선비족을 응징한 사례가 눈에 띈다. 유리왕 11년(기원전 9), 선비족이 국경을 침범했을 때 고구려의 용장인 부분노(扶芬奴)는 ‘힘보다 계략’을 강조하며 적국의 지형과 적군의 성격을 충분히 파악하고 작전계획을 수립했다. 그는 간첩을 써서 적을 교만하게 만들어 소수병력으로 적을 유인한 후 잠복부대를 출격시켜 적의 본거지를 기습 점령하고, 협공으로 적 퇴로를 차단해 섬멸한다는 전법을 사용했다. 반간(反間)과 유인 및 협격(挾擊)을 복합적으로 활용한 그의 작전술은 결코 단순한 군사교리의 종합이 아니었다.

 고구려의 신대왕(165~179) 집권기에 후한의 태수 경림(耿臨)이 대군을 일으켜 침공했을 때의 일이다. 당시 국왕은 싸울 것인가 아니면 지킬 것인가를 놓고 숙고하고 있었다. 이때 국상인 명림답부(明臨答夫ㆍ67~179)가 ‘선수후공(先守後攻)’ 전략은 병가의 상식이라며 자신감 있는 방어책을 내놓았다. 그의 계책은 적군과 아군의 피아 병력수를 헤아려 ‘군사가 많은 자는 마땅히 싸워야 하고 군사가 적은 자는 지켜야 한다(衆兵者宜戰, 兵少者宜守)’는 원칙에 따라 적 보급선을 신장시키면서 아군의 전통적인 청야전과 추격전을 병행한다는 것이었다. 결과는 172년 11월의 좌원전투에서 고구려군이 한군을 맞아 대승을 거뒀다.

 이 외에도 고구려 유리왕 32년(서기 13) 부여와의 사이에 벌어진 전쟁에서 고구려의 총사령관인 무휼(無恤)은 지형적인 이점을 이용해 복병전술로 적을 유인해 기습과 추격으로 적군을 섬멸시켰다. 이 역시 고구려의 독자적인 병법에 의한 쾌승이었다.

대무신왕 11년인 28년 후한의 광무제가 요동군을 동원해 고구려를 침공해 왔을 때는 을두지(乙頭智)의 계략이 빛났다. 무모한 결전을 회피할 것을 강조한 그의 전략은 성을 굳게 지키고 지구전으로 대응해 침공군의 예봉을 둔화시켜 스스로 퇴각하게 만든다는 묘책이었다. 이에 따라 대무신왕은 연못의 잉어를 잡아 수초에 싸서 술과 함께 한군 진영으로 보냈다. 성 안에 풍부한 물과 양식이 있음을 내비친 자신감 있는 고구려의 전략을 알아차린 한군은 결국 대무신왕의 글이 공손하다는 이유를 대며 군대를 이끌고 물러갔다.


 한국적 병학의 정립과 국제화

 중국의 선진 문물을 수입하는 과정에서 중국의 병서나 병학이 수용돼 종래의 한국적 병학과 병법의 수준이 더욱 높아졌다. 이미 고조선을 거쳐 한문화(漢文化)가 전래되면서 한반도에서도 한자가 사용됐고, 삼국시대에는 한학(漢學)이 일어나 병가의 학문을 선도했던 것이다.

 고구려에서는 일찍부터 유학이 발달해 소수림왕 2년인 372년 태학을 세워 귀족 자제를 교육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전쟁의 시대’에 영토 확장을 최대의 국가전략으로 삼고 있던 고구려가 중국 병가의 술이나 병서에 관심을 가졌으리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고구려에서는 중국의 춘추시대(B.C. 770~B.C. 221))에 ‘치국의 술’로 제시된 ‘손자’ ‘오자’ 등의 병서가 수입돼 태학이나 경당에서 교육됐다. 특히 지방 곳곳의 경당에서는 미혼 자제들이 궁사(弓射)를 익히며 병서를 공부하기도 했다.

 대체로 삼국에는 지배층 인사들이 오경(五經)을 위주로 유가 경전과 역사서 및 제자백가서를 받아들여 이를 읽거나 동시에 무예를 익히는 일에도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문무를 중시하는 사회적 분위기로 보아 아마도 상당한 수준의 병학과 병법이 일상화됐을 것이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여러 기사는 문(文)과 무(武)의 기풍이 공존하는 삼국시대에 병법에 능통한 인재들이 크게 활약했음을 잘 보여준다.

 백제의 장군 막고해는 문무의 소양을 겸한 인물이었다. 그런가 하면 신라에서는 병법에 조예가 깊은 무오대사가 병법서를 바쳐 인정을 받고 굴압현령의 관직을 제수받았다. 김유신 또한 ‘천시ㆍ지리ㆍ인화’를 중시하며 손자의 핵심 군사사상을 관통한 지장이었다. ‘용간(用間)’을 철저히 적용해 정보ㆍ첩보전을 구사한 그의 병술은 탁월했다.

을지문덕의 경우에는 ‘벌모’ ‘벌교’ 등을 비롯해 산지(散地) 전략으로 표현되는 ‘견벽청야(堅壁淸野)’와 ‘청야수성(淸野守城)’ 등 전통적인 고구려 전법 외에 우중문을 대상으로 고도의 심리전을 전개한 데서 보듯이 가히 군사적 천재(military genius)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백제의 무관들도 병법서에 해박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달솔 곡나진수(谷那晋首) 등이 일본에 병서와 병법을 전했다는 사실은 결코 한국의 병학 수준이 더 이상 국내 수준에 머물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하겠다.

 특히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독자적인 병법을 개발해 이를 실제 전장에서 적용하고자 했던 것 같다. 당 태종이 병법의 대가인 이정(李靖)과 함께 나눈 ‘이위공문대’를 보면 이른바 ‘연개소문 병법’이 소개되고 있다.

고려조의 병서로 알려진 ‘김해병서(海兵書)’가 연개소문의 병법과 연관된다는 견해가 결코 허황된 주장만은 아니다. 630년 이후 고구려의 방어전략이 전통적인 산성방어에서 평원전술을 도입한 ‘적극적 방어전략’으로 전환된 것이 연개소문이 직접 지휘한 천리장성의 축조와 무관하지 않다. 게다가 수·당 제국이 종래와 달리 요하지역을 결코 쉽게 넘어서지 못했던 것은 요하를 교두보로 삼아 수성전(守城戰)을 펼치면서 일대의 평야에서 적극적인 평원전(平原戰)을 전개한 연개소문의 방어전략 때문이었다.

고구려의 전략적 전환에 연개소문이 관여했고, 그것이 바로 ‘연개소문 병법’의 실행과 관련됐으리라는 지적은 음미해 볼 만하다.


 통일 신라시대의 안보학

 통일신라 이후 국가적으로 병법이나 병서의 발간 등 병학의 발전이 두드러졌다. 현재는 남아 있지 않지만, 기록상 가장 오랜 병서인 ‘무오병법(武烏兵法)’ 15권과 ‘화령도(花鈴圖)’ 2권이 신라 왕조의 공식적인 병서다.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아마 통일전략의 진수를 담은 내용이었을 것이다. 혜공왕 2년 766년에는 ‘안국병법(安國兵法)’이 보급됐다. 이는 병서를 넘어서 국가의 안정과 질서를 유지하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안보총서의 성격을 지닌 치국방략을 담은 책이 아니었나 싶다.

 당에서 음양가의 술법을 배워 ‘둔갑입성법(遁甲立成法)’을 저술한 김암(巖)은 귀국 후 사천대박사에 임명돼 농한기 때마다 육진병법(六陣兵法)을 가르치며 일반민을 교화시켰다. 군사학술이 국가사회의 발전에 요체가 됐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경순왕이 고려에 귀부할 때, 태조 왕건이 “부(富)는 오랫동안 계속됐고 귀(貴)는 모토(茅土)에 거했으며, 육도삼략(六韜三略)은 가슴속에 들어 있고 칠종오신(七縱五申)을 손바닥으로 잡았다”며 신라의 군사술과 병략을 평가한 것이 결코 회유를 위한 공치사만은 아니었다.

<백기인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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