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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자
2007.01.09 15:3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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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다시보는 6·25 -<1>흥남철수작전과 1·4후퇴
다시보는 6·25 - [군사기획]
<1> 흥남철수 작전과 1·4후퇴

자유 찾아 남으로 남으로

한만 국경으로 진출했던 국군·유엔군이 중공군의 공세에 밀려 후퇴하자 북한 주민들 중 많은 사람이 다시 공산독재 치하에서의 삶을 거부하고 자유를 찾아 월남을 결정했다. 이로 인해 피란민 대열이 남으로 뚫린 도로를 가득 메우게 됐고 또 일부는 군이 사용 중인 항만으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군은 최초 병력과 군수물자 후송에만 관심을 뒀을 뿐 군사작전에 지장을 줄 정도의 피란민 발생은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피란민 수효가 증가하자 군은 이들의 안전한 후송을 위한 적극적인 대책을 수립했다. 이들은 혹한·질병, 그리고 굶주림에 시달리며 육로·해상으로 북한을 탈출했다.

남한까지의 먼 거리와 영하 30도의 강추위는 이들 피란민들에게 거의 절망적인 조건이 아닐 수 없었다. 만약 그들이 어떤 적절한 교통수단을 이용하지 못한다면 38선에 이르기 전에 공산군의 진격이 피란민 대열을 앞지를 것이 자명했다.

국군과 유엔군이 후퇴를 시작하자 함경도 지방의 많은 주민도 피란길에 올랐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진·함흥·흥남·원산 등의 항구에는 피란민들로 큰 혼잡을 빚었다. 당시 미10군단장은 최초 군인·경찰·공무원 등의 가족 2만5000명을 피란시킬 계획을 수립했으나 연일 밀려드는 피난민을 보다 못해 다시 5만 명으로 늘렸다.

그러나 이것도 부족해 수송 수단이 허용하는 대로 가능한 한 많은 피란민을 후송한다는 원칙 아래 피란민이 이용할 수 있는 군용선과 목선을 총동원했다. 선편 후송이 시작되면서 흥남부두를 비롯한 시내 중심가에는 배를 타려는 피란민들로 일대혼잡을 이루었다.

그리고 국군이 미 공군기편으로 비행장을 떠날 때 비행장 주변에 몰려든 피란민들 중에는 “이 어린 자식만이라도 데려가 달라”고 애원하는 부모들의 눈물겨운 모습도 있었다. 흥남철수작전이 완료된 12월 24일 이후에도 흥남부두에는 배를 타려는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마지막 수송선이 부두를 떠날 때 육지에 남은 피란민들은 울부짖으며 떠나는 배를 향해 몸부림쳤고, 일부는 바다에 몸을 던지기도 했다. 이 기간 중 군이 후송한 피란민은 10만 명을 상회했고 이때 거의 같은 수의 피란민이 선박 부족으로 그대로 뒤에 남겨졌다.

이와 같이 북진했던 국군과 유엔군의 1·4후퇴 때 자유를 찾아 남하한 피란민은 멀리는 산간 오지인 함경북도 혜산진에서부터 가깝게는 강화도 북쪽의 연백에 이르기까지 북한 전 지역에서 발생했다. 이때가 피란민 발생의 절정기로 총수는 100만 명을 상회했다.

훗일 이때의 이별의 아픔을 노래한 ‘굳세어라 금순아’라는 제목의 대중가요가 한(限)을 달래면서 한 세대를 풍미했으며 오늘도 그날을 되돌아보게 한다.

<양영조 군사편찬연구소 전쟁사1팀장>

[국방일보-2007.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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