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보는 6·25 - [군사기획] |
<2> 1·4후퇴 전후 유엔군 철수·확전 논쟁 |
1950년 말∼51년 초 중공군 공세로 타격을 받은 유엔군은 새로운 전략을 모색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특히 미 국무부는 38선 부근에서 안정된 방어선을 확보한 다음 협상을 통해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자고 주장했으며, 미 국방부는 한반도 철군과 재정비에 의한 전쟁 확대를 각각 주장하고 있었다. 이러한 주장이 나오게 된 원인은 중공군이라는 새로운 적의 출현에 따른 군사목표 때문이었다. 즉, 북한 인민군의 격멸과 한국을 통일된 민주자유국가로 만들겠다는 유엔의 정책 목표를 변경시켜야 하느냐 고수해야 하느냐를 놓고 상반된 의견이 노출됐다. 미 국무부 관리들은 중공군의 6·25전쟁 개입의 군사적 의미를 검토한 결과 중공군 개입 이전에 설정된 군사목표, 즉 ‘북한인민군의 격멸’이라는 임무는 재검토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유엔군이 공격 계획을 포기하고 일정선의 방어진지로 후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유엔군사령부는 아군이 공세에서 방어로 전환했으나 공산군에 비해 병력이 절대 열세하므로 현 상황에서 추가 병력을 시급히 투입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우세한 병력을 동원한 중공군과의 전쟁에 즈음해 지금까지 상대적으로 소규모인 북한군에 대응해 오던 정치적 결심과 군사전략은 수정돼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38선 현상 유지 정책의 채택 유엔군은 중공군과의 충돌에서 많은 인명·장비 피해를 입었고 특히 혹독한 겨울 날씨로 군사작전에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됐다. 더구나 야전에서 새로운 공격을 준비하는 동안 미국의 전쟁지도부에서는 중공군 참전에 대한 지도노선 선택을 놓고 많은 이견을 보였고, 때로는 한 치의 양보도 없는 갈등으로까지 치닫게 됐다. 따라서 이는 현지 작전지휘관의 국경선 작전 수행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됐다. 많은 논의 끝에 결국 미 육군참모총장 콜린스 대장은 맥아더 장군에게 대규모 부대 증원이 불가하다는 점을 통보했고, 미 합참은 현 상황에서 유엔군의 병력 보존이 최우선적 고려 요소라고 강조했다. 이 무렵 최종 결정된 유엔군 작전계획에는 9개 방어선이 설정됐고 서울을 중점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서울 북쪽에 4개 방어선이, 그리고 최종 방어선으로 낙동강 방어선이 설정됐다. 결과적으로 중공군 3차 공세 직후 유엔군의 반격으로 전황이 역전됐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전쟁을 더 이상 확대하지 않기로 하고 전쟁 이전의 현상 유지 정책을 결정했다. 이것은 전쟁지도 방침이 군사적 측면보다 정치적 측면으로 바뀌었음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즉, 유엔군의 목표가 한반도 통일에서 38선 봉쇄로 축소되고, 그 후 유엔군 임무는 정치가들이 해결책을 논의하는 동안 전선을 유지하고 공산군에 출혈을 강요하는 정도로 한정됐다. <양영조 군사편찬연구소 전쟁사1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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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일보-2007.01.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