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보는 6·25 - [군사기획] |
<3>유엔군의 한국 망명정부 수립 계획 | 군경 등 100만명 수송계획 세워
1951년 초 유엔군사령부는 중공군 참전 이후 새로운 전략을 모색하는 가운데 한국정부를 망명시켜 후일을 도모한다는 계획안을 심각하게 검토했다. 이는 한국 정부도 모르는 실로 놀라운 계획이었다. 유엔군의 전쟁지도 지침에 “강압에 의한 철수시 유엔군은 일단 일본으로 철수하되 한국 정부와 군경을 제주도로 이전시켜 망명정부를 설치하고 저항을 계속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당시 미국이 극비리에 추진한 이 계획에 따르면 “대한민국이 법적 정통성을 유지하고 전쟁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한국 정부와 군경을 제주도로 이전시킨다”고 전제하고 그 대상 인원을 행정부 관리와 그 가족 3만6000명, 한국 육군 26만 명, 경찰 5만 명, 공무원, 군인·경찰 가족 40만 명을 포함하고 기타 요원을 고려해 도합 100만 명으로 판단해 수송계획까지 세웠다. 정부 위치는 제주도가 적지로 결정됐다. 그러나 그곳에는 이미 25만 명에 달하는 피란민·포로가 수용돼 있고 식수가 부족해 추가 수용이 불가능한 실정이었다. 그러므로 유엔군은 먼저 이곳에 수용된 포로들을 근해 도서로 이송키로 계획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한국민을 일본으로 이동시키지는 않기로 했다. ▲한국민 절체절명의 기로 당시 유엔군 입장으로서는 철군계획이 적에 누설돼서는 안 된다는 측면보다 국군에 미칠 영향을 보다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었다. 철군 결정 시점을 전선이 금강선으로 남하할 때로 판단하고 있었지만 한국군 붕괴를 우려해 부산 교두보에 도착할 때까지는 철군 준비명령을 하달하지 않는다는 방침이었다. 결과적으로 유엔군이 철군 마지노선 부근인 37도선에서 적을 저지하고 또 중공군이 더 이상의 공세를 멈춤으로써 망명정부 계획은 전면 취소됐다. 우리 입장에서는 천만다행의 일이었지만 당시 양측의 전세 판단은 분명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물론 우리의 입장으로서는 유엔군이 세운 망명계획에 따라 제주도로 이전할 것인지 아니면 유엔군이 철수하더라도 부산교두보에서 끝까지 저항하기로 선언할 것인지의 선택은 오직 우리 정부와 국민들의 몫이었다. 적어도 우리 정부 입장에서 보면 유엔군 계획안은 한국민의 처리를 유엔이 담당한다는 정도만 언급됐을 뿐, 베트남의 패망 때 나타난 바와 같이 자유를 위한 ‘보트 피플’이 얼마나 발생할지, 그리고 식량·예산 등은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등에 관한 구체적 대책이 전혀 없는 계획이었다. 아무튼 제주도 망명계획안은 도서로 정부를 이전하느냐 아니면 교두보에서 마지막까지 저항하느냐 하는 운명적 선택의 기로가 될 수 있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 과정에서 적의 기도와 전략을 오판하게 되면 국가 운명마저 크게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귀중한 교훈을 얻었다. <양영조 군사편찬연구소 전쟁사1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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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일보-2007.01.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