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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23 14: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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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다시보는 6·25 -<6>정부의 총력전과 국민방위군 사건
다시보는 6·25 - [군사기획]
<6>정부의 총력전과 국민방위군 사건

100만 청년 무장 중공군 격퇴 ‘결속’


▲정부의 총력전 의지

1·4후퇴의 위기를 넘기면서 37도선에서 간신히 전선의 안정을 기했으나, 중공군의 연속적인 공세에 전장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 중공군의 몇 차례 공세를 계기로 한국 국민들은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좌우하는 엄숙한 현실을 직시하고 모두가 스스로 들고 일어나 힘을 보태려고 했으며, 정부는 100만 청년을 무장시켜 중공군을 격퇴시키려 했다.

한국 정부는 국군과 유엔군이 전선에서 위기에 처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이 우리의 자유 독립을 위한 최후 결전 단계임을 선언하고, 국민총력전으로 이를 극복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때 소집영장을 기다리던 청년들 사이에는 자진입대를 간청하는 인원이 증가했고, 이들 중에는 “나는 화랑도 정신을 갖고 있다. 전쟁의 승리는 우리에게 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신명을 바칠 것이다”라는 혈서를 쓰고 지원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 무렵 미국 정부는 새로운 부대가 창설하는 것보다 기존부대를 보충하는 것이 효과적인 방안이라고 최종 채택함으로써 그 계획은 어렵게 됐다.

▲국민방위군의 편성과 해체

한국 정부는 중공군과 맞서 싸우려면 많은 병력이 필요할 것으로 판단하고 소요병력을 조속히 동원할 목적으로 독자적으로 국민방위군을 설치했다.

국방부와 육군본부는 국민방위군 사령관에 대한청년단 단장인 김윤근을 단번에 준장으로 임관시켜 임명하고 참모진을 구성했다. 최소한의 기간요원만이 현역으로 임명됐고, 나머지 지휘관은 모두가 주로 청년단 출신에서 급조된 방위군 장교로 충당됐다.

병력 응모를 시작하자 순식간에 50만 명을 넘었다. 방위군은 대체로 이들을 현역에 준해 편성했고, 사령부 예하에 전국 51개소에 교육연대를 설치, 17세부터 40세까지의 장정들을 수용했다.

전국 각지에서 창설 작업을 하고 있던 방위군은 중공군의 공세로 남쪽으로 이동하게 됐고, 지역별로 대구·부산 등지로 남하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사령부의 고급 간부들이 보급품을 부정으로 착복함으로써 전대미문의 불행한 사고가 발생하고 말았다. 이 사건은 일부 간부들이 정치권과 결탁해 야기된 것이었다.

일부 간부들이 방위군의 이동과 수용에 사용해야 할 국고·양곡·피복 등 보급자원을 착복했고, 영하의 기온에서 장거리를 이동해야 하는 수많은 장정이 보급품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해 도중에 병에 걸리거나 심지어는 아사·동사하는 대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유명무실하게 된 국민방위군은 그 창설 목적을 달성하지도 못하고 해산됐다.

정부는 이 사건을 무마하고 다시 전력을 증강하기 위한 노력을 백방으로 기울였다. 부정한 방위군 간부들을 총살형에 처해 엄벌로 다스리는 한편 전 국민적 총력태세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다. 아울러 미국으로부터 보다 강력한 지원을 받기 위해 다각적인 외교활동을 강화했다.

<양영조 군사편찬연구소 전쟁사1팀장>


[국방일보-2007.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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