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보는 6·25 - [군사기획] |
<7>프랑스軍 영웅 ‘몽클라르’ | 예비역 등 편성 ‘독립부대창설 파병’ 제안
6·25전쟁이 발발할 당시 프랑스는 내각이 빈번히 교체되면서 정국이 불안정한 시기였다. 그리하여 내부 문제로 프랑스는 정규군의 건제부대를 파견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때 ‘몽클라르’로 불린 베르느네 중장이 “예비역과 현역 지원병으로 편성되는 프랑스 독립부대를 창설해 파병하자”고 제안했고 마침내 1950년 10월 1일 유엔군 프랑스 대대가 편성됐다. 몽클라르 장군은 파병 부대가 대대급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부대 지휘관을 자청했다. 당시 국방차관이 “내가 알기로 미국의 대대는 중령이 지휘관인데 장군인 당신이 어떻게 대대장을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자 그는 “저는 육군중령이라도 좋습니다. 저는 언제나 전쟁터에서 살아왔습니다. 저는 곧 태어날 자식에게 제가 최초의 유엔군 일원으로 참전했다는 긍지를 물려주고 싶습니다”라고 결연한 의지를 밝혔다. 몽클라르 장군은 프랑스 대대를 지휘하기 위해 장군 계급장을 포기하고 5개의 깃털 장식이 달린 중령 계급장을 달았다. 그리하여 그는 비록 계급은 ‘강등’됐지만 유엔군 프랑스 지상군 부대의 사령관이 됐다. ▲지평리 전투와 몽클라르의 용전 미군들에게 6·25전쟁에서 가장 대표적인 전투를 꼽으라고 하면 으레 장진호 전투와 지평리 전투를 들곤 한다. 그만큼 두 전투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어려운 상황에서 극적으로 잘 수행했던 전투였기 때문이다. 지평리 전투에서는 프랑스군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지평리는 조그마한 마을로 3개 방면의 주요 도로가 교차되고 사방이 고지로 둘러싸여 전략적 요충지였다. 51년 2월 13일 이곳 방어를 맡은 미23연대전투단에 프랑스 대대가 배속돼 있었다. 원래 미2사단장은 지평리가 돌출돼 있기 때문에 그 남쪽 여주로 철수시킬 복안이었으나 제8군사령관으로부터 고수 명령을 하달 받았다. 이때 중공군은 유엔군 주력의 측면을 위협해 지평리를 공격하면 유엔군이 철수할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중공군 제39·40·42군이 지평리를 확보하고자 공격을 개시했으며 제42·66군으로 원주 일대의 유엔군을 고착시켰다. 미 전투단은 낮 동안 진지로 접근하는 적의 공격을 포병사격과 항공폭격으로 저지했으나 야간에 중공군이 자동화기와 박격포·포병으로 공격 준비 사격을 실시한 후 경적·호각·나팔 등을 불면서 공격해 접전이 전개됐다. 프랑스 대대는 미군에 배속된 후 쌍터널 전투의 전공으로 미 대통령의 부대표창을 받아 사기가 고조돼 있었다. 몽클라크 대대장은 적이 포위망을 압축하면서 접근하자 적이 지근거리로 접근할 때까지 사격하지 않도록 통제하고 육박전에서도 우위를 점하도록 지휘해 적을 수차례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지평리 전투는 유엔군이 중공군과 싸워 얻은 최초의 전술적 성공이었으며, 그동안 아군이 지난 12월과 1월 초의 곤혹스러웠던 시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각오로 전투에 임할 수 있는 전환점이 된 전투였다. 여기에 몽클라르의 눈부신 공이 있었다. <양영조 군사편찬연구소 전쟁사1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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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일보-2007.02.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