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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05 16: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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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다시보는 6·25 -<8>백야사의 토벌 작전
다시보는 6·25 - [군사기획]
<8>백야사의 토벌 작전

후방 교란 공비 토벌부대 편성


▲북한군의 제2전선 형성

1951년 말 국군의 후방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공비들은 주로 북한군 패잔병과 호남·영남지역의 지방공비들이었다. 이들은 지리산을 근거지로 병참선을 차단하거나 후방 시설들을 파괴함으로써 아군의 후방을 크게 위협하고 있었다.

이들은 중공군 신정공세시 남쪽으로 진출했던 북한군 일부가 주변 산악으로 도주해 지방공비들과 합류한 공비들이었다. 이에 육군본부는 51년 12월 호남지역에서 준동하고 있던 공비 수가 아군 전선에 큰 위협이 되고 있다고 판단하고 이들을 토벌할 계획을 수립했다. 그리하여 2개 사단 규모의 토벌부대를 편성, 제1군단장 백선엽 소장을 사령관으로 하는 군단급 특수임무부대인 ‘백야전전투사령부’(백야사)를 창설했다.

지리산 공비는 남부군의 직속부대인 제81·92사단과 경남도당 사단인 제57사단, 그리고 전북도당 사단들이 주류를 이뤘다.

이들은 여순 10·19사건 당시 반란군 출신 중 생존해 있던 인원과 북한군 전투부대의 낙오병들로 구성됐다.

공비들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백운산·덕유산 등 험준한 산악지대에 거점을 두고 국군·유엔군의 보급로 차단, 식량 약탈·지서 습격·차량 기습·통신망 절단·살인·방화 같은 만행을 자행했다.

따라서 이들의 행동은 전후방 전력에까지 파급됐고 민심은 극도로 동요돼 국민들의 사기를 크게 저하시키고 있었다.

▲백야사의 ‘쥐잡기’ 토벌작전

백야사는 작전명을 ‘쥐잡기’로 정하고 51년 말부터 52년 2월 말까지 호남지역 공비토벌작전을 전면 개시했다. 수도사단과 제8사단 6개 연대를 기동타격대로, 경비부대와 예비 연대, 그리고 경찰부대를 저지부대·거점수비대로 운용했다. 이때 정부는 사전에 서남지방에 계엄령을 선포함으로써 사전 조치를 취했으며 또 이 지역의 민간인 이동을 통제하고 마을 간의 전화 교신도 차단했다.

작전이 개시되자 기동타격부대는 지리산을 남북으로 양분해 북쪽은 제8사단이, 남쪽은 수도사단이 담당해 공비 주력을 타격했고 경찰 등 저지부대는 충분한 종심을 두고 배치해 공비의 퇴로를 차단했다. 이에 공비들은 지리산 일대의 유리한 지형과 근거지를 버리고 토벌부대를 피해 분산되기 시작했다.

백야사 예하 부대들은 계속해 지리산·백운산·덕유산 일대에 전투부대를 동시 투입해 공비 잔당을 대부분 토벌했고 공비의 핵심 지도자로 활동했던 자들을 대부분 사살하거나 포획함으로써 작전을 마무리 지었다.

백야사의 전과는 작전 기간 동안 사살·포로·투항 등을 포함해 1만6000여 명에 달했고 노획무기도 3000여 정을 상회했다. 백야사는 수도사단에 작전임무를 인계하고 춘천으로 이동한 후 화천에서 제2군단으로 재창설됐다.

백장군은 훗날 “민심에 기반을 두었기에 토벌작전을 성공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으며, 문덕면 한천부락에는 당시 주민들이 힘을 모아 세운 백선엽 송덕비가 세워져 있다.

<양영조 군사편찬연구소 전쟁사1팀장>

[국방일보-2007.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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