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보는 6·25 - [군사기획] |
<9>김일성 남침 구상과 비밀회담 | 北 군사력 증강 소련·중국 설득
김일성은 구 소련 비밀 외교문서에 의하면 정권 수립 직후 남침을 구상했고 스탈린의 허락을 받기까지 1949년 3월과 50년 3월 두 차례 회담을 가졌다.먼저 49년 3월 5일 김일성은 박헌영을 대동하고 스탈린을 방문했다. 이 회담은 통상 ‘경제 및 문화협정’으로 알려져 왔으나 실제로는 군사회담이 중심이었다. 이때 스탈린은 김일성의 남침 구상에 대해 아직 때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고 대신 대규모의 군사 차관과 지원을 약속했다. 이 회담 직후부터 북한군의 전력은 급속도로 증강됐다.이에 고무된 김일성은 스티코프 대사에게 대남 공격을 준비해야겠다고 제안했다. 김일성은 옹진반도 점령 계획을 제시해 “옹진지역 확보가 장차 공격작전에 유리한 발판이 될 뿐만 아니라 전선을 120㎞나 축소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그러나 그의 몇 차례 제안은 국제 정세를 고려한 스탈린의 반대로 무산됐다. 스탈린은 오히려 “남한 내에 빨치산 활동을 강화하고 반동체제의 파괴와 인민봉기 확산, 군사력 증강에 힘을 집중할 것”을 강조했다. ▲북·중·소 남침 결정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 지도부는 이후 소련의 핵실험 성공과 중국 공산정부 수립, 중·소 회담 등 정세에 크게 고무됐다. 김일성은 중국 공산정부가 수립되자 “이제 남조선 해방 차례”라고 하며 중공·소련을 설득하기 위해 박차를 가했다.그는 50년 1월 17일 스티코프 대사에게 선제공격 계획에 관한 승인을 얻기 위해 스탈린과의 회담을 주선해 주도록 요청했고 스탈린은 중대한 사안을 논의한다는 것을 전제로 비밀리에 회담을 추진할 것을 지시했다. 그리하여 김일성은 박헌영을 대동하고 딱 1년 만인 50년 3월 30일 다시 모스크바를 비밀리에 방문했다. 이 회담에서 스탈린은 비로소 ‘국제환경이 유리하다’고 언급했고 남침을 허락했다.다만 스탈린은 이 결정에 모택동의 합의를 전제로 함으로써 중공도 함께 전쟁 책임에 끌어들이는 신중함을 보였다. 즉, 스탈린은 “이 문제의 최종 결정은 북한·중공에 의해 공동으로 이뤄져야 하며 만일 모택동의 의견이 부정적이면 새로운 협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결정을 연기해야 한다”고 전제했다.모택동 역시 내부 개혁을 위해 스탈린의 지원이 간절했으므로 그 결정을 거스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모택동은 중국을 방문한 김일성 일행을 맞아 스탈린의 결정을 전적으로 환영하며 중국도 적극적으로 지원할 의사를 밝혔다. 이미 김일성은 모스크바에서 복귀한 후 곧장 남침 공격작전 계획을 구체적으로 수립하도록 북한군 총참모부에 지시했고, 결국 총참모장 강건과 새로 부임한 고문단장 바실리에프 중장을 비롯한 소련 군사고문단이 중심이 돼 작전계획을 완성했다. 이 역시 최종적으로 스티코프의 대사를 통해 스탈린의 동의를 받아야 했다. <양영조 군사편찬연구소 전쟁사1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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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일보-2007.03.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