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보는 6·25 - [군사기획] |
<11>국제사회의 휴전 열망 | 스탈린 사망 정전 협상 ‘급물살’
유엔군과 공산군 측이 정전협상 문제를 놓고 오랫동안 난항을 거듭하는 동안 국제사회에서는 휴전에 대한 열망이 커져 가고 있었다. 이미 1953년 초에 이르러 국제적십자사를 비롯한 다양한 국제 기구들이 전쟁 종식을 촉구하고 나섰다. 적십자사는 전쟁 종결과 제네바 협정에 따른 부상병·포로 송환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가결시켰으며, 이 결의 내용을 유엔총회에 상정할 예정이었다. 한편 선거 공약에서 조기에 전쟁을 종결시키겠다고 강조했던 미국 신임 대통령 아이젠하워도 53년 연두교서를 통해 미 해군의 대만 봉쇄를 철회하기로 결정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중공을 압박했다.중공은 지금까지 대만 정부의 군사적 위협에 대해 별 부담을 갖지 않고 한국 전선에 모든 군사력을 집중할 수 있었지만 미국의 이 조치로 군사적·심리적으로 큰 부담을 안게 됐다. 미국의 이러한 방침은 공산 진영의 전략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스탈린의 사망과 평화 분위기 제고 이러한 국제정세 하에서 그동안 지지부진하던 정전협상이 급물살을 타게 된 결정적인 전환점이 발생했다. 즉, 53년 3월 5일 이 전쟁을 막후에서 설계·주도하고 있었던 소련 수상 스탈린이 갑자기 뇌출혈로 사망한 것이었다. 그의 사망은 전쟁 종식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가 사망하자 곧바로 소련 정책자들은 국제정세에 맞춰 스탈린의 정책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권력을 인수받은 말렌코프는 스탈린 사망 당일 이미 국내외 정세의 변화를 고려한 새로운 노선으로의 정책 입장을 밝혔다. 그리하여 유엔군 측에서는 소련의 정치무대에 새로운 인물이 다수 등장했으므로 말렌코프 행정부의 정책과 입장을 파악하기 위해 조심성 있게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소련 비밀외교문서에 의하면 소련은 동년 3월 19일 “현 정치적 상황에 부합하도록 전쟁을 종결시킨다는 결론을 내렸으며,
세계평화 구축을 위한 전쟁 중지는 중국과 북한 인민들의 이해에 부합한다”는 입장을 북한·중국에 전달했다. 아울러 서독 인준 문제에 대해서도 상당히 유화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이제 전쟁의 직접 당사자인 북한·중공이 전쟁 종식을 원할 경우 곧바로 휴전할 수 있는 분위기가 성숙되고 있었다. 이 무렵 북·소 간의 비밀전문에 의하면 당시 김일성도 “우리 측이 전쟁의 종결과 평화 달성에 관한 주도권을 잡을 때가 왔다”고 해 소련의 새로운 노선에 적극 따를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따라서 전쟁을 주도했던 공산군 측 독재자 스탈린이 죽자 소련뿐만 아니라 중국·북한의 전쟁 정책이 크게 변화됐고, 유엔군 측은 이러한 공산주의자들의 변화된 외교노선에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됐다. <양영조 군사편찬연구소 전쟁사1팀장> |
[국방일보-2007.04.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