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보는 6·25 - [군사기획] |
<13>6·25전쟁 영웅 맥아더 장군 해임 | 확전 주장 … 트루먼과의 갈등 심화
워싱턴발 라디오 방송은 1951년 4월 12일 “트루먼 미 대통령이 맥아더 장군을 유엔군사령관, 주일 연합군사령관, 극동 미군사령관, 극동 미 육군사령관 지위에서 해임했다”는 충격적인 내용을 보도했다. 맥아더 장군은 “노병은 죽지 않고 다만 사라져갈 뿐”이라는 생도시절 불렀던 가사를 마지막 말로 남기고 52년간의 긴 군생활을 한반도 전장에서 마감했는데, 그의 해임에는 간단치 않은 정치·군사적 배경이 작용했다. 전장의 최고 지휘관과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의 의견 충돌이 급기야 ‘전선사령관 교체’라는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맥아더의 해임을 몰고 온 대통령과의 갈등은 중공군 개입 시기부터 시작됐으나 미국의 정책이 제한전을 벌일 것으로 결정되면서 더욱 악화됐다. 워싱턴 수뇌부는 전쟁을 38도선에서 제한한다는 내용을 맥아더 장군에게 몇 차례 하달했으나 현지 사령관인 맥아더는 그 명령에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이러한 갈등은 유엔군이 자신감을 회복하고, 38선을 향해 진격을 계속하면서부터 더욱 확대됐다. ▲미국의 현상유지 정책과 맥아더의 해임 워싱턴의 정책 당국자들은 51년 3월 맥아더의 ‘확전 의지’에 제동을 걸기 위해 대통령의 성명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통령의 성명에 앞서 문제가 발생하고 말았다. 유엔군이 38선에 도달할 무렵 맥아더 원수가 기자회견에서 다시 확전을 주장한 것이었다. 맥아더 장군은 워싱턴의 명령을 무시하고 “유엔이 현재의 군사적 제한 조치를 풀고 군사행동을 중국의 해안선과 오지까지 확대한다면 중국은 곧 군사적 붕괴 위기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트루먼 대통령에 대한 일종의 반발이었다. 어찌됐든 이것은 곧장 영국을 비롯한 자유진영으로부터 큰 반발을 불러왔다. 그뿐만 아니라 공산군과의 협상을 통해 전쟁을 종결지으려던 트루먼 대통령을 곤경에 처하게 만들었다. 맥아더 장군은 그 발언에 이어 대대적인 반격작전을 강행했다. 그의 마지막 결단이었다고 할 수 있는 38선 이북으로의 진출 결심은 ‘정지보다 전진이 유리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이에 트루먼 대통령은 마침내 마지막 고심 끝에 마셜·브래들리·애치슨·해리먼 등 참모들과 협의를 거쳐 51년 4월 12일 ‘맥아더 원수 해임’이라는 극약 처방을 내리고 말았다. 그의 후임으로는 제8군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을 임명했다. 맥아더 장군의 해임은 제8군에는 물론 전쟁 전체에 큰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었다. 맥아더 장군은 해임된 이후에도 많은 일화를 남겼다. 미 국민들이 아이젠하워보다 맥아더를 두 배 이상 큰 규모로 환영했다는 것이 화제가 됐고 또 흔히 말하는 맥아더 청문회라고 불리는 상원의 군사외교합동위원회에 소환됐을 때에도 많은 화제를 낳았다. 그러나 그가 너무 지나칠 정도로 자기 정당성을 변호했고 급기야 대통령까지 공격함으로써 세상의 빈축을 사게 됐다. 결국 그로 인해 군인으로서의 그의 위대함에 그림자를 지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장에서 보여 준 그의 신화는 전쟁 역사상 거의 전무후무한 업적이었다. <양영조 군사편찬연구소 전쟁사1팀장> |
[국방일보-2007.04.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