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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05 17:3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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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제목 : [국방저널]인천상륙작전과 서울탈환의 전사적 의미



제목 :
인천상륙작전과 서울탈환의 전사적 의미

저자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전쟁사부 선임연구원 남정옥

수록 : 국방저널, 2006.09월호


56년 전 국토의 5%밖에 남지 않은 낙동강 방어선에서 한미 연합군이 사생결단식
결전방어를 하고 있을때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을 결행, 놀랄 만한 군사적 성공을 거둠으로써 ‘태평양의 시저’로서의 명성을 재확인했다. 인천상륙작전은 그 창의성과 대담성, 그리고 전략적 기습을 통해 일거에 최종 목표인 수도 서울을 탈환하고 북진의 계기를 마련했다. 이 작전의 성공을 두고 전사가들은 “과거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이 로마군을 섬멸, 전쟁 국면을 단 한 번의 결정적인 전투로 유리하게 반전시킨 것에 비교해‘20세기 칸나에(Cannae) 전투’로기록하고 있다.

최악의 조건과 상황 속에서 감행

인천상륙작전은 모든 악조건하에서 전개됐다. 인천상륙작전은 상륙지역의부적합, 북한군의 전면적 공세로 인한 낙동강 전선의 어려운 전황, 미 본토 증원 병력의 부족 및 더딘 전개 등을 고려할 때 최악의 조건과 상황 속에서 이루어졌다. 즉, 낙동강 전선에서 한미 연합군의 전력 열세, 인천 상륙에 대한 합참과 해군의 반대, 상륙 부대의 병력 부족(미군 사단의 부족 병력 은 한국의 카투사로 충원)과 훈련 미비 등 모든 상황이 최악이 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아더가 이를 단행한 것은 태평양 전쟁을 통한 상륙전에 대한 풍부한 실전 경험, 승리에 대한 강력한 의지와 확신, 단기 결전으로 10만 명의 병력 피해를 줄일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에서 비롯됐다.
맥아더는 북한군의 8월 공세가 계속되고 있던 8월 12일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준비 명령을 하달했다. 인천상륙작전의 전략 적 개념은 낙동강 방어선의 제8군이 망치(hammer)가 되고, 인천에상륙하는 미 10군단(미7사단과해병사단, 국군17연대와 해병대)이모루(slag)가 돼 북한군 주력을남북에서 협공해 격멸 하는데 있었다.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달성하고자 했던 전략적목표는 첫째 한국에서 두번째로 큰 인천항을 확보할 수 있고, 둘째 북한군에 낙동강과 경인지역이라는 두개의 전선에서 전쟁을 강요 해적의 전투력을 분산 할 수 있고, 셋째 한반도의 허리를 차단해 서울에서 낙동강에 이르는 북한군의 보급로를 차단 할 수 있고, 넷째 서울 탈환으로 북한에 정치적ㆍ심리적인 치명타를 가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상륙지역인 인천은 조수간만의 차가 심했기 때문에 그 시기 선정에 매우 제한적이었다. 조수간만의 차를 고려할때 9월 이후 인천에 상륙 할 수 있는 적기는 9월15일, 10월11일, 11월2일과 11월 3일로 네 번뿐이었다. 그런데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 날짜를 9월15일로 결정했다. 맥아더가 인천상륙 시기를 9월15 일로 결정한 데에는 만일 상륙 시기를 더 이상 연기할 경우 3개월의 치열한 전투로 인해 극심한 전장 피로에 지쳐 있는 미 제8 군이 사력을 다해 지탱하고 있는 낙동강 방어선이 붕괴 될 가능성이 컸고, 이 기간을 이용해 북한군이 인천지역의 방어를 강화 할 위험이 농후했기 때문이었다. 또 쌀의 수확기인 10월 이전에 작전을 개시해야만 전쟁 수행에 필요한 식량확보에 유리한 입장이었다. 특히 이 작전이 연기 될 경우 한미 연합군을 비롯한 유엔군은 새롭게 동계 작전을 수행해야 될 상황이었다.
상륙 지점으로 인천을 선정하게 된 것은 오로지 맥아더의 상륙작전에 대한 풍부한 전투 경험과전략적 식견에의 한 승리를 향한 결전 전략에서 비롯됐다. 맥아더는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한국에서 전쟁이 개시된 지 나흘 후인 6월 29일에“인천과 서울을 탈취하면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북한군을 압도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맥아더는 태평양 전쟁에서도 주로 일본군에 바이패스(bypass)라는 전략 개념을 통해 전략적 목적에 기여 할 수 있는 상륙작전을 수행,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예를 들면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던 무렵인 1945년 2월 19일 미 제5해병군단(3개 해병사단)은 유황도(硫黃島)에 대한 상륙작전을 실시했다. 일본도쿄(東京)와 사이판 섬 중간에 위치한 이 섬은 남북 8km, 동서 4km의 크기에 한 포기의 나무도 없는 유황으로 뒤덮인 불모의 작은섬에 불과했지만 사이판에서 도쿄까지 4300km에 달하는 B - 29 폭격기의 비행거리를 절반으로 단축시키기 위해 미군에는 전략적으로 절대 필요한 섬이었다. 미국은 함정 600척, 해병 3개 사단, 중폭격기 3개 연대, 함재기1600대, 전차 600대에 달하는 방대한 전투력을 투입해 1개월 동안의 작전을 통해 전략적 도서인 유황도를 점령, 작전 목적을 달성했다.


한미 연합군 최초의 공세 작전

이처럼 맥아더는 한반도에서의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상륙작전을 감행했다. 그는 1개월도 못된 짧은 상륙작전 준비 기간과 워싱턴으로부터의 강력한 반대를 설득시킨 후 군인으로서그 누구도 흉내 조차 내지 못 할 자신의 눈부신 명예와 업적을, 속칭 세상에서 ‘5000 대 1이라는 세기의 도박’에 일신을 내던졌다. 그는 ‘패배를 승리로 일변 시킬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친다면 신은 이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에 따라 행동했다. 그는 이를 위해 모든 악조건을 사전 치밀한 준비로 최소화 했고, 작전 실시 중에 봉착 할 수 있는 난관을 위해 기함인 매킨리호에 승선한 9월 12일부터 상륙부대가 한강을 도하해 연희고지로 진출하는 21일까지 작전 지역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작전이 잘못 될 경우에는 자신의 명예가 손상 되더라도 이를 즉각 중지하고 복귀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상륙 작전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1950년 9월 15일 항공모함 4척을 포함한 261척의 함정으로 수송된 2개사단 약7만 5000명의 한미 연합군으로 구성된 상륙부대는 300대의 전투기 엄호하에 최초 월미도에 상륙을 개시했다. 그리하여 인천~서울 일대의 북한군 약1만5000명을 구축하는 한편 공군의 지원으로 철원 일대로부터 서울로 증원되는 약 3만 명의 북한군을 차단함으로써 한미 연합군은 9월16일 밤까지 교두보 확보에 성공했다.
이때 낙동강 방어선의 미 제8군도 낙동강 전선으로부터 반격을 개시해 9월26일에는 스미스부대가 첫 전투를 치른 오산 북방에서 미7사단 31연대의 선두 부대와 극적으로 조우했다. 이후 한미
연합군은 연희고지 전투와 추석날인 9월 26일 치열한 시가지 전투를 고비로 적의 전투력이 급격히 약화되자 미7사단과 해병사단, 그리고 국군17연대와 해병대는 연합 작전을 통해 9월 28일 적
에게 빼앗긴 지 만3개월 만에 서울을 다시 탈환했다. 9월 29일 중앙청에서 거행된 역사적인 환도식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맥아더에게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해 그 전공을 치하했다. 한국 국민도 때늦은 감이 있었지만 1957년 7월 1일 유엔군사령부의 서울 이전에 맞춰 상륙작전시 지휘소로 사용했던 자유공원에 장군의 동상을 세워 고마움을 표했다.
이렇듯 인천상륙작전은 한미 연합군이 맥아더의 지휘하에 최초로 결행한 공세작전으로 연합군은 적의 전선을 한반도 중앙에서 남북으로 분리해 두개의 전선을 강요하고 병참선을 차단함으로써 공세 이전의 여건을 조성했다. 또 인천상륙작전으로 아군 10만명의 손실을 줄였을 뿐만 아니라 곡창지대인 남한지역을 10월 이전에 수복해 한국 국민이 때맞춰 가을추수를 할 수 있게 함으로써 전시 안정적인 식량 확보에 커다란 기여를했다.
특히 인천상륙작전은 한미 연합 작전 체제의 가능성을 보여 준 결정적 계기가 됐다. 한국 해병대는 미군과 나란히 인천 지역에 해두보(海頭堡)를 확보했고, 국군17연대도 한강 남안에서 미7사단과 함께 도하 작전을 실시해 수도 탈환 작전에 일조했다.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쌓인 한국군에 대한 믿음과 신뢰는 휴전 이후 한미 동맹의 근간으로 작용하고 있는 한미연합작전 및 방위 체제 형성에 맹아적(萌芽的)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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