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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자
2006.02.14 10: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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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병영칼럼) K형, 나 전역했소!
[병영칼럼]
"K형, 나 전역했소!"

K형! 요즘 미국 생활은 어떻소. 남들이 부러워하던 꽤 괜찮은 직장을 내던지고 새로운 도전을 해 보겠다며 미국으로 총총히 떠난 지도 벌써 2개월이 지났소. 사실은 나도 지난해 12월31일, 34년의 군생활을 마치고 군복을 벗었소. 아직 2년의 정년이 남았지만 K형의 용기에 힘입어 나도 한번 만용을 부려본 것이지요.

여러 해 전 어느 겨울날 밤, 술 한잔 마시고 늦게 들어온 나에게 아내가 “어서 옷 벗고 저녁 드세요”했을 때, 내가 “군인에게 군복 벗고 전역(저녁)하라니 무슨 말이냐”며 트집 잡던 일이 생각나오. 하지만 이번에는 아내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내가 결국 ‘옷 벗고 전역’을 하고 말았소.

K형도 그랬겠지만 지금의 나도 조금은 시원하면서도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도전과 기대로 가슴이 설레오. 난들 청춘을 바쳐온 지난 군생활에 대한 미련이 왜 없겠소마는 지금이 바로 떠나야 할 때라고 굳게 믿기에 아쉬움을 애써 감춰 버리고 싶소.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네’라는 길재(吉再)의 시 구절이 있지요. 그런데 나는 최근 나의 주변을 둘러보며 ‘인걸은 의구하되 산천은 간 데 없네’라는 정반대의 생각이 들기 시작했소. 나 자신은 여전히 변함이 없는데 주변 여건이 바뀐 것이오. 산은 산이로되 이미 옛 산이 아니니 이제는 내가 길을 떠날 때가 아니겠소.

K형! 어느 식당 주인 말에 따르면, 구운 고기 맛의 비결은 적절한 때 잘 뒤집는 데 있다고 합디다. 내 인생을 굽는 고기로 치면 나는 아직 한 쪽밖에 안 익은 ‘설익은 고기’에 불과하니 지금이 바로 나 스스로 뒤집을 시기라고 생각하오. 내 인생이 한쪽으로만 새까맣게 태운 고기 같아서야 되겠소. 또 짐을 가득 실은 수레이기보다 아직 여백이 남아 있을 때 떠나는 수레가 되고 싶소. 여백이 남아 있는 수레라야 길 가는 도중에 새로운 소중한 것을 더 실을 수도 있고, 또 가득 실은 수레에 비해 수렁에 빠질 위험도 더 적지 않겠소.

돌이켜 보면 내 인생에서는 내가 원하는 것 중 대개 첫 번째보다는 두 번째 것이 이루어진 적이 더 많았던 것 같소(물론 아내는 예외적으로 첫 번째 만난 여인이지만). 조물주께서는 교만한 나에게 최선이 아닌 차선의 것만을 주심으로써 겸손과 나의 부족함을 일러 주신 것이오. 미완성을 통해 완성을 지향케 하셨으니 참으로 감사할 뿐이오.

K형! 나는 전역을 10일 앞둔 지난 12월21일 한국을 떠나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다산·동의부대와 이라크의 자이툰부대를 방문하고 전역일인 31일 저녁에야 귀국했소. 매우 어렵고 위험한 여정이었지만, 그동안 성실치 못했던 군생활에 대한 자책과 반성, 그리고 미래에 대한 도전을 겸해 고행을 자청했소. 참으로 우리 장병들이 잘하고 있어 내가 한국인·한국군이라는 사실이 너무나 자랑스러웠소. 더구나 자이툰부대에서는 동기생인 사단장이 나의 전역 축하 파티까지 열어 줘 여간 고맙지 않았소.

끝으로 이 부족한 부하가 군생활을 의미있게 마무리지을 수 있도록 그동안 지도하고 배려해 주신, 내가 가장 존경하는 군인 합참의장께 진심으로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소. 떠날 때는 말없이 떠나야 하는데 이토록 말이 많은 것을 보면, 아직도 군에 대한 미련이 그만큼 많이 남아 있나 보오.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오. 안녕히 계시오.

<예·육군대령 원태제 前 합참공보실장, 現 군사편찬연구소 전쟁사부장>

[국방일보-2006.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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