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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6.28 11:0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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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美 CIA의 '영도유격대'



제목 : 美 CIA의 '영도유격대'

저자 : 전쟁사부 선임연구원 조성훈

수록 : 국방일보, 2004.06.26


c6·25전쟁 당시 반공 유격대 활동은 초기부터 있었다. 비록 소규모이지만 북한군이 점령한 강원도·경기도 지역 등에서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유격대를 결성해 활동했다. 그들은 북한군이나 국군·경찰로부터 획득한 무기로 무장했다.

국군도 적 후방을 교란하기 위해 유격사령부·명부대·결사유격대 등을 창설, 작전을 전개했고 미국도 군 당국은 물론 중앙정보국(CIA)에서도 유격전을 수립·실행했다.

이 가운데 영도유격대는 전쟁 당시 부산 영도를 근거지로 강원도 일대와 함경남북도까지 공중·해상으로 침투해 활동한 유격대다. 이 유격대는 미 CIA가 한국에서 독자적으로 작전을 수행하는 데 언어나 인종적 요소·지형 미숙 등으로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인으로 편성한 부대다.

전쟁이 일어나자 CIA는 극동군사령부·미8군사령부와 별도로 활동했다. 1951년 초 미8군과 CIA는 적 후방 작전 지역을 서로 구분, 미8군이 서해안을 맡고 CIA는 동해안과 북한 동북부 산악 지역을 담당하기로 합의했다.

작전 지역이 동해안 북부 지역이므로 대원들은 1·4후퇴시 월남한 강원도·함경도 출신 가운데 북한에서 반공 투쟁 경력이 있는 사람을 주로 모집했다. 1200명에 이르는 대원은 영도 기지에 설치된 유격훈련장과 해상훈련장에서 전투 훈련은 물론 낙하산 훈련·수중폭파 훈련도 받았다.

영도유격대는 강원도 북부로부터 함경남북도 지역을 황룡관구·청룡관구·백호관구·오봉관구 등 4개 작전 지구로 편성했다. 국군과 유엔군의 38선 재진출 이후 고착화된 지상작전을 타개할 목적으로 적 후방 교란과 첩보 수집을 위해 51년 4월부터 52년 10월까지 약 900명이 해상·공중을 통해 본격적으로 침투했다. 대원들은 현지에서 많은 반공청년을 규합, 지역 주민과 유기적 활동을 전개했다.

후방 지역에 침투한 대원들은 51년 7월16일 최제부 등 대원 12명이 함경북도 무산군 연사면 소재 임산 작업장을 기습하는 작전처럼 소규모 작전을 주로 하되 10월28일 함경남도 갑산읍에 북한군 대대병력이 주둔하고 있다는 정보를 부대본부에 제공, 전투기의 지원을 받아 합동작전을 전개하기도 했다.

이와 별도로 해상대는 함경남도 여도를 중심으로 원산에서 청진에 이르는 전 해안을 작전 지역으로 설정, 52년 1월 하순 함북 학성군 일신철교 폭파작전을 비롯해 10여 차례 작전을 수행했다
이처럼 유격대원들은 적 후방 지역에서 내무서·군용 창고·탄약 공장 등을 공격해 민심을 교란하고 북한군·중공군의 병력과 보급품 수송을 방해했다. 이에 따라 북한 측이 내륙에 침투한 유격대 토벌과 해안지대의 경비 강화를 위해 병력을 늘려 배치했으므로 유격대 활동은 적의 병력 분산에 기여했다.

그러나 52년 여름부터 CIA 측은 북한 지역에 침투한 대원들이 점차 적에게 노출돼 북한으로부터 온 첩보 보고를 불신한 데다 정전협상의 분위기가 무르익게 되자 12월 초 부대를 해체했다. 침투 대원 가운데 귀환한 40명을 제외하고 대다수는 북한 지역에서 전사했거나 실종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처럼 많은 희생을 무릅쓰고 국가가 어려울 때 계급도 군번도 없이 적 후방으로 침투, 활발한 유격 활동을 전개한 영도유격대는 CIA의 통제 아래 운용됐고 정전 이전에 해체돼 그들의 경험과 교훈마저 잊혀졌다. 생존 대원들은 자신들의 활동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음을 아쉽게 여기면서 젊음을 불살랐던 ‘영도 태종대’가 기억되기를 바라고 있다.

<조성훈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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