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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7.20 20: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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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제목 : 다시 찾은 서울, 그리고 38선돌파 논쟁 (국방저널)



제목 :
다시 찾은 서울, 그리고 38선돌파 논쟁

저자 : 전쟁사부 선임연구원 최용호

수록 : 국방저널,''이달의 전투사'', 2003.03월호


1951년 1월 4일, 중공군의 3차공세로 서울을 포기한 국군과 유엔군은 평택-삼척을 잇는 37도선까지 철수했다. 이때 미국 등 자유진영의 전쟁지도부는 중공군의 공세에 따른 충격으로 한반도를 포기하는 방안까지 검토하고 있었다. 자유진영의 입장에서 볼 때 3년 1개월 동안 계속되었던 전쟁기간을 통해 이때가 가장 곤혹스러운 시기였다. 그러나 제8군사령관 릿지웨이(Matthew B. Ridgway) 장군은 이 같은 위기 속에서 오히려 적극적인 위력수색 작전을 통해 "중공군의 전력이 예상보다 강력하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반격에 나섰다. 그 결과 국군과 유엔군은 수리산과 관악산 등에서 끈질긴 저항을 계속하는 중공군을 격파하고, 2월 10일에는 한강 남쪽에 진출하여 강북(江北)의 서울 도심을 바라보게 되었다.

하지만 국군과 유엔군은 3월 중순까지 한강을 도하하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도하할 의도가 없었다. 릿지웨이 장군의 판단은 "국군과 유엔군이 월등히 우세한 전투력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서울을 공격할 경우, 서울에 있는 중공군으로부터 강력한 저항을 받게될 것이므로, 한강에 의해 퇴로가 차단된 아군부대가 오히려 위험에 빠질 수 있다"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 서울탈환을 위한 우회 포위 공격

사령관의 이 같은 판단에 따라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을 직접 공격하기보다는 중부지역의 전선(戰線)을 가평-춘천 지역까지 북상시켜, 서울의 중공군을 동측방에서 포위하기로 했다. 이 같은 작전 개념에 따라 2월 5일, 국군 제3·5·8사단과 미 제2사단 등이 횡성에서 홍천방향으로 공격하는 라운드업(Round Up)작전을 시작했다. 그러나 공격 중이던 제5·8사단이 2월 12일, 중공군의 4차공세로 막대한 피해를 입고 원주까지 철수하고 말았다. 반면 미 제23연대가 지평리의 고수방어로 중공군의 집요한 공세를 물리쳤다.

중공군의 4차공세가 저지되자, 국군과 유엔군은 실패했던 라운드업(Round Up)작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3월 6일부로 리퍼(Ripper)작전, 즉 절단작전을 감행했다. 4차공세의 실패로 타격을 입은 중공군에게 다음 공세를 준비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으면서 원주-춘천 방향으로 공격을 계속하여 적을 동서(東西)로 절단한 후, 서울의 중공군 주력을 포위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3월 12일, 국군과 유엔군이 홍천 남쪽 삼마치고개에 진출했을 무렵부터 중공군이 서울을 포기하고 철수하는 징후들이 곳곳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서울에 주둔하고 있던 대규모의 중공군 부대들이 북쪽으로 철수하는 것이 항공정찰에 의해 관측된 것이다.

또한 이날 한강을 도하해 서울시내를 정찰했던 미 제3사단의 정찰대도 중공군 부대가 서울에서 이미 철수했음을 확인했다. 이어서 3월 14일, 국군 제1사단에서 파견된 정찰대도 서울 시가지를 정찰하였으나 적 부대를 발견하지 못 했다. 이때 정찰대의 일부가 중앙청으로 진출해 태극기를 게양했을 때도 적의 반응은 없었다.

▲ 한강 도하작전 및 서울 수복

서울에서 중공군의 주력이 이미 철수했음을 확인한 제8군사령관은 서울탈환을 결심하고, 미 제1군단장에게 "3월 15일을 기해 서울 북쪽의 주요 고지군을 점령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따라 미 제1군단장은 국군 제1사단장 백선엽 준장에게 1개연대 규모로 북한산을 점령케 하고, 미 제3사단은 1개대대 규모로 용마산(현 중랑구 면목동)을 점령토록 했다.

서울 탈환임무를 부여받은 국군 제1사단 15연대장(김안일 대령)은 3월 15일 05:30에 수륙양용장갑차로 무장된 1개대대를 마포방면으로 도하시켜 시가지를 점령했다. 그리고 16일 아침에는 연대의 주력을 도하시켜 서울시 전역을 장악하였으며, 13:00에는 신성모 국방부장관 등의 군 수뇌부가 제1사단의 한강도하 상황을 시찰했다. 그러나 우려하였던 중공군의 반격이나 시가전(市街戰)은 없었다.

국군의 서울탈환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지난해 전쟁이 발발한 이후 불과 3일만인 6월 28일, 북한군에게 내주었던 서울을 인천상륙작전과 치열한 시가전 끝에 93일만인 9월 28일, 탈환했었다. 그런데 두 번째의 수복작전은 지난 1월 4일, 중공군에게 내어준 후 71일만에 시가전 없이 무혈점령하게된 것이다.

그 동안 서울은 점령군이 4번씩이나 바뀌어 말 그대로 폐허가 되어있었다. 시내의 건물과 교통 및 통신시설 등 공공시설은 폭격과 포격으로 심하게 파괴된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 식량 등 주민 식생활의 궁핍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당시 150만 서울시민중 피난을 가지 않고 남아있던 시민은 20만이었는데, 이들에게 제공해줄 식량마저도 부족한 실정이었다. 때문에 정부는 1차 탈환 때 있었던 것과 같은 대규모의 서울 수복행사를 열지 않았으며, 각종 홍보매체를 동원하여 서울의 생활여건이 개선될 때까지 시민들이 복귀를 자제해주도록 호소했다. 아울러 당시 전황으로 볼 때 "또 다시 서울을 빼앗기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에 서울수복 후에도 정부의 기능은 한동안 임시 수도인 부산에서 수행되었다. .

▲ 서울수복의 의의

미 제8군사령관 릿지웨이 장군은 절단(Ripper)작전을 통해 홍천-춘천 방향에 대규모 돌파구를 만들어 전선을 동서(東西)로 분리시킨 다음 서울에 있는 중공군 주력의 퇴로를 차단한 후 섬멸하려 했다. 그러나 서울의 중공군은 이 같은 상황을 조기에 알아차리고, 후방으로 철수해 버렸다. 따라서 유엔군의 공세는 적의 전투력을 섬멸하지 못하고, 밀어 올려 지형을 차지하는데 그침으로써 반쪽의 승리를 거둔 셈이었다.

하지만 정치적인 입장에서 볼 때, 서울 탈환의 의의는 몇 개 사단의 적을 섬멸한 것보다 더 큰 의의가 있었다. 국군과 유엔군이 예상보다 빨리 서울을 탈환함으로써 전쟁의 분위기를 일신하고, 한국 국민의 사기를 고양시킬 수 있었으며, 전쟁을 주도하고 있는 미국을 비롯한 자유진영 국가들에게 "중공군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 결코 지지 않는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 서울수복에 이어 야기된 38선 돌파 논쟁

한편 미국과 자유진영의 전쟁 지도부는 1951년 2월 1일, 유엔의 결의를 통해 중국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이어서 서울을 탈환하여 전쟁의 자신감을 되찾았지만, 전선이 38선 가까이 접근하자, 38선을 돌파하는 문제로 또 한차례의 소용돌이를 겪게되었다. 즉, 여전히 불투명한 소련의 개입 가능성과 함께 "한반도의 전쟁이 제3차 세계대전으로 비화될 있다"는 우려 때문에 "한반도에 통일정부를 수립한다"라는 전쟁 초기의 계획을 ''명예로운 휴전''으로 수정하게된 것이다.

전쟁의 목표를 ''명예로운 휴전''으로 설정하게 되자, 후퇴하고 있는 중공군의 꼬리를 물고 진격을 계속하고 있던 유엔군이 "38선에서 멈춰 설 것인가, 38선을 넘어 계속 진격할 것인가?"의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자유진영의 국가들은 대부분 "38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지만, 미국의 입장은 중국이 그랬던 것처럼 "38선에 정치적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38선을 돌파하는 문제는 유엔군사령관이 군사적으로 판단해서 결정할 사항이다"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전장(戰場)을 만주까지 확대하여야한다"는 유엔군사령관 맥아더(Douglas MacArthur) 원수의 굽히지 않는 확전론(擴戰論)과 워싱턴의 제한전쟁(制限戰爭)론이 충돌했다. 그 결과 맥아더 원수가 1951년 4월 11일자로 해임됨으로써 한반도의 전쟁은 "38선 부근에서 명예로운 휴전으로 끝낸다"는 정책으로 굳어져 버렸다.

서울탈환의 희소식으로 조국통일의 기대에 부풀어 있던 한국정부와 국민들은 "유엔이 전쟁을 휴전으로 마무리하려 한다"라는 소식을 전해 듣고 분개했다. 그리고 휴전을 반대하는 국민궐기에 나섰다.
결국 당시 자유진영이 채택했던 휴전정책은 통일의 염원을 안고 있던 한국 정부와 국민들에게는 더할 수 없는 아쉬움으로 남게 되었지만, 세계전략을 추구하고 있던 미국정부와 자유진영의 입장에서 볼 때는 "한반도의 전쟁을 조기에 마무리 지으려면 아쉽지만 휴전을 택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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