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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7.21 10:3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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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제목 : 되돌아보는 베트남전쟁과 교훈 (국방저널)



제목 :
(남베트남 패망 28주년) 되돌아보는 베트남전쟁과 교훈

저자 : 전쟁사부 선임연구원 최용호

수록 : 국방저널,''''이달의 전투사'''', 2003.04월호


1975년 4월 30일 11시, 남베트남의 수도인 사이공(현 호치민시)의 대통령궁(현 독립궁)을 향해 북베트남의 전차 1대가 담장을 부수며 돌진했다. 그리고 게양되어 있던 남베트남 국기를 끌어내리고,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NLF)의 깃발을 올렸다. 이로써 지난 1955년 10월에 건국된 베트남공화국(Republic of Vietnam)은 20만에 역사의 무대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나라가 없어지자, 남아있는 주민들에게 폭풍이 밀어 닥쳤다. 새로운 사회주의공화국을 ''''민족주의의 승리''''라며 반겼던 남베트남 주민들은 급속히 바뀌는 공산주의 체제에 적응할 수 없었다. 표면적으로 남쪽 주민의 자주역량에 의한 NLF 정권이 수립된 것으로 되어 있었으나, 실제는 북의 조종을 받는 허수아비 정권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150만에 이르는 사이공 정부의 공무원들과 동조자들은 지방으로 강제 이주되고, 20만명의 고위직 인사와 군간부들은 재교육장에 수용되었다. 또한 1975년 한해만 해도 소형 선박에 목숨을 걸고, 조국을 탈출한 ''''보트피플(Boat People)''''이 23만명에 달했다. 이 같은 필사적 탈출은 베트남정부가 도이머이(쇄신 : 刷新)정책을 채택한 1986년 이후까지 이어졌으며, 현재까지도 베트남은 가난한 나라의 위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 제1차 베트남전쟁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프랑스는 동남아시아 지역에 대한 기득권(旣得權)을 주장하며, 베트남에 군대를 파병했다. 그러나 베트남은 프랑스군이 상륙하기 전인 1945년 9월 2일, 호찌민(Ho Chi Minh)의 주도로 베트남민주공화국(Democratic Republic of Vietnam) 수립을 선포하고, 대부분의 행정조직을 장악했다. 이에 따라 과거의 식민지(植民地) 체제를 부활시키려는 프랑스군과 독립을 주장하는 호찌민 세력의 충돌은 필연적이었다.

호찌민 세력의 저항에 직면한 프랑스는 이들을 제압하기 위해 최신장비로 무장된 강력한 병력을 계속 파병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식민체제와 제국주의적인 정책은 명분을 얻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빈약한 재래식 장비로 무장된 게릴라 수준의 호찌민 세력을 용이하게 제압할 수 없었다.

공방전을 거듭하던 프랑스 결국 1954년 5월 7일, 디엔비엔푸(Dien Bien Phu) 전투에서 패배하자, 그 해 7월 20일, 제네바에서 호찌민 세력과 협정을 체결했다. "베트남을 북위 1도선을 따라 남북으로 분할하여, 북은 호찌민 정부가 통치하고, 남은 프랑스의 식민지 체제를 유지하되, 2년 후인 1956년 7월까지 남·북 총선거를 실시하여 통일정부를 수립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로써 1945년부터 시작되었던 제1차 베트남전쟁은 호찌민 세력의 승리로 막을 내리게 되었으며, 그들은 이때의 전쟁을 ''''항불(抗佛)전쟁''''이라고 부른다.


▲ 제2차 베트남전쟁

프랑스가 베트남에서 철수를 결심했던 1954년은 공산주의 팽창의 도미노 현상이 극에 달했다. 이미 동유럽과 중국이 공산화되었으며, 한반도에서 발생한 6.25 전쟁이 겨우 봉합되었다. 그러나 이념의 대립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한반도 적화에 실패한 공산주의 팽창의 기세가 동남아시아로 방향을 바꿈으로써, 베트남이 이념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된 것이다.

베트남의 입장에서 볼 때 이 같은 상황은 ''''독립과 민족의 통일을 위한 투쟁''''이었다. 그러나 자유진영의 입장에서 보면 ''''냉전(冷戰)체제에 의한 동서의 대립의 일환''''이었다. 이 때문에 프랑스가 베트남에서 철수하자, 동남아시아에서 공산주의 팽창을 막기 위한 후견국의 역할을 미국이 떠맡게 되었다.

이 같은 배경에 따라 미국의 강력한 지원을 받게된 남베트남의 젊은 지도자 응오딘지엠(Ngo Dinh Diem)은 1955년 10월, 호찌민의 북베트남에 대항하는 베트남공화국(Republic of Vietnam)을 건국하고,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로써 베트남은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하는 새로운 남·북 분단체제가 형성되었다.

미국이 베트남 사태에 개입하자, 호찌민은 강력히 반발했다. 그리고 남부에서 활동하고 있던 NLF와 함께 지엠 정부의 전복을 시도함으로써, 제2차 베트남전쟁, 즉 항미(抗美)전쟁에 돌입했다.
남베트남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되자, 미국은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군사고문단''''에 이어 전투병력을 파병하여, 베트남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했다. 그리고 우방국의 지원을 호소함에 따라 한국정부도 2개의 전투사단을 파병하게 되었다.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적극 개입하자, 당시의 많은 사람들은 "남베트남 정부가 머지 않아 국내의 게릴라를 제압하고, 동남아에서 공산주의 팽창을 막는 보루(堡壘)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할 수 있을 것"으로 낙관했다.

그러나 남베트남 정부가 의욕적으로 계획하였던 각종 정책들이 주민들의 의사를 무시한 채 실적위주로 무리하게 추진됨으로써, 민심 이반을 초래했다. 여기에 지엠 대통령의 족벌(族閥) 독재정치에 의한 부패가 기승을 부리게 되어, 정치·사회적 혼란이 극에 달했다. 그 결과 지엠 일족(一族)은 1963년 11월, 군사 쿠데타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던 지엠정권이 무너진 남베트남은 1967년 9월, 응웬반티우(Nguyen Van Thieu)가 대통령에 취임하기까지 4년 동안, 무려 열 번의 정권교체가 반복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정국은 혼미상태에 빠졌다. 또한 쿠데타로 집권한 세력들은 민생을 도외시한 채 자신들의 권력기반 강화에만 몰두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군인과 공무원들 역시 국가에 대한 충성심보다는 자신의 안위만을 추구하게 되었다. 이어서 종교인, 학생, 그리고 각종 이익단체들이 자신들의 몫을 챙기기 위한 집단 이기주의 성격의 시위에 가담함으로써, 혼란을 부채질했다.

반면 북베트남의 호치민은 미국과 싸우는 중에도 중국 및 북한의 전투병력 파병제안을 거절하고, 오로지 베트남인에 의한 자주적 통일을 위해 헌신한 인물이었다. 또한 그는 부정이라는 단어조차도 어울리지 않을 만큼 청렴한 정치인이었다.

그 예로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온 그가 1969년 9월 2일 79세를 일기로 사망하였을 때, 남겨진 유산이라고는 대나무 침대와 책상, 그리고 애독하던 장서 몇 권이 전부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호찌민의 조국애에 감동한 많은 남베트남 주민들조차 그의 사망소식이 전해지자, 검은 리본을 달고,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고 한다.

이 같은 민심은 대규모의 군사력을 동원한 미국의 힘으로도 결코 거스를 수 없었으며, 1968년 1월, 북베트남과 NLF에 의한 ''''구정공세''''를 계기로, 미국 내의 전쟁반대 시위가 극에 달했다.
마침내 전쟁과 국민의 반대에 지친 존슨 정부는 평화협상을 모색하게 되었으며, 1973년 1월 27일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파병했던 모든 군대를 철수시키게 되었다. 이로써 제2차 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남·북의 베트남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 제3차 베트남전쟁

평화협정이 체결되자, 남베트남은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나라를 지켜야 했다. 그러나 외세 척결을 외쳐오던 대부분의 남베트남 국민들은 모든 외국군이 철수했음에도 북베트남과 NLF의 도발에 대해 방관적 자세로 일관했다.
당시 남베트남에는 미군이 철수하면서 넘겨준 최신 장비와 함께 100만 명이 넘는 지상군, 세계4위를 자랑하는 공군력 등 막강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낡은 재래식 장비와 빈약한 보급체계를 가지고 있는 북베트남과 NLF의 전력은 결코 비교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1975년 1월, 북베트남군의 공세가 시작되자, 이에 맞선 남베트남군은 전투다운 전투도 해보지 못한 채, 4월 30일 최후를 맞이했다. 그리고 허수아비와 같았던 NLF 정권은 1976년, 북베트남이 주도하는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The Socialist Republic Vietnam)''''에 흡수되고 말았다.

▲ 베트남 전쟁의 교훈

세계 최강의 전력을 보유하고 있는 미국은 1961년 베트남전쟁에 개입한 이래 12년 동안 연병력 300만, 최대 55만명의 병력과 1,600억 달러의 전쟁비용을 부담하면서 남베트남을 도왔다. 그러나 남베트남은 그들의 자유를 지켜내지 못했다.

그 원인은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남베트남 주민들이 민족주의로 위장한 공산주의 세력을 구분하지 못한 것이다. 북베트남과 NLF의 도발을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시키기 위한 공산주의 세력으로 보기보다는 민족의 통일을 추구하는 세력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대부분의 남베트남 국민들은 자신의 나라를 지키고자하는 확고한 신념이 없었었다.

또한 남베트남 정정(政情)의 혼란과 함께 국민들의 집단이기주의에 의한 시위로 사회혼란이 가중되었고, 정부는 국론을 결집시키지 못했다. 그리고 이 같은 혼란은 공권력의 부패와 전투력 약화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되어, 국민들은 정부를 믿고 생업에 종사할 수 없었다.

남베트남의 패망과정은 역사 및 문화적으로 유사점이 많을 뿐만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비슷한 유형의 분단체제를 겪고 있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국민들의 단결된 힘이 없다면, "병력의 숫자와 무기의 성능만으로 전쟁의 승리를 보장할 수는 없다"는 교훈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베트남의 역사를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으며, 주변의 강대국과 북의 위협이 상존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직시해야만 한다. 그리고 "지도층의 솔선수범과 함께 민·관·군의 혼연일체만이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는 역사적 교훈을 깊이 새겨야하며, 현시점에서 우리가 택할 수 있는 길은 단결된 국민의 힘을 보여주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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