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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7.20 19:4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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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제목 : 초기지연작전의 전투사적 의의 (국방일보)



제목 : 초기지연작전의 전투사적 의의

저자 : 전장새부 선임연구원 남정옥

수록 : 국방일보, 2002.07.20


c 한국전쟁은 한국에게 있어 가장 준비가 안된 최악의 상황에서 T-34전차와 SU-76 자주포 등 현대식 장비로 무장하고 잘 훈련된 부대로 편성된 북한군의 기습남침에 의해 1127일 동안 밤낮없이 싸운 처절한 동족상잔이었다. 그 결과 피아(彼我) 20여개국이 3년여 동안 치른 중요한 전투 및 작전만 해도 154개에 달하고, 군소(群小) 전투까지 합하면 그 숫자는 무려 233개 전투에 이른다.

c그 중 1950년 7월 한 달 동안 한미연합군이 수행한 12개의 전투는 한국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전투였다. 이 시기 국군은 서울이 실함(失陷)되고, 한강교 조기 폭파로 병력 및 장비의 절대부족 등으로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그 결과 미군의 증원과 교두보 확보는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였다. 이는 공간(空間)을 양보하고 시간을 획득하는, 소위 시간 벌기식 ''지연전''(delaying action)만이 문제의 해결책이었다. 군은 이러한 작전개념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부대개편을 단행하였다. 육군본부와 사단 사이에 2개 군단을 신편하여 지휘의 효율성을 갖추었고, 또 기존 8개 사단을 6개로 축소·개편 후, 7월 20일 병력손실이 격심한 제2사단을 해체, 5개 사단 2개 군단 체제를 형성하였다.

c7월 1일 미군의 한반도 전개는 한미연합작전 형성의 계기가 되었다. 정일권 총참모장과 처지 장군은 스미스 부대의 파한(派韓)에 따라, 경부가도를 축으로, 서부전선은 미국이, 중동부전선은 한국군이 맡는 ''한미연합작전''에 합의하였다. 또 7월 7일 ''유엔군사령부 설치 결의안''에 의거 7월 10일 맥아더 원수가 유엔군사령관에 임명되고, 7월 13일 육군본부와 미 제8군사령부가 같은 날 대구로 이동함에 따라, 양국은 한미연합합동회의 및 통합작전체제의 구축으로 오늘날 한미군사동맹의 초석이 되는 한미연합작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또한 7월 14일 국군의 작전지휘권이 맥아더 원수에게 이양됨으로써 국군은 미군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c미국은 개전 7일 째인 7월 1일 제24사단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파한된데 이어, 7월 4일에는 제24사단 본대가 전개하였다. 7월 10일에는 제25사단이, 18일에는 제1기병사단이, 22일부터는 제29연대와 제5연대전투단이 속속 들어옴으로써 7월 미 전투병력은 3개 사단 2개 연대에 달하였다. 그러나 이들 미군은 본토 증원병력이 아니라 일본과 하와이 주둔 병력이었다.

c한편 북한군은 개전 초 승기(勝機)를 최대로 이용, 8월 15일 부산점령을 목표로 총공세를 펼쳤다. 북한군은 38경비여단 3개를 사단으로 증편하고, 후방 사단을 전선에 투입하는 등 전과확대에 총력을 기울였다. 반면 국군은 쇄도해 오는 적을 저지하고, 개전 초 막심한 전투손실의 보충 등 어려운 상황을 맞고 있었다.

c이처럼 7월 한 달은 공자(攻者) 및 방자(防者) 모두에게 전쟁의 승패를 가늠하는 분수령이었다. 국군은 적의 출혈을 최대한 강요하면서 ''공간을 내주고 시간을 버는'' 지연전을 택함으로써 낙동강 방어선 형성에 필요한 공세적 방어전투를 수행, 다대한 성과를 거두었다. 제6사단의 동락리와 이화령전투, 제8사단의 단양전투, 수도사단·제2사단(-)·독립 제17연대의 진천전투, 제3사단의 영덕전투, 제1사단·독립 제17연대의 화령장전투, 제6사단과 제1사단의 영강전투, 제8사단과 수도사단 제1연대의 안동전투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 전투의 성공으로 국군은 적의 진출을 최대한 저지시킴으로써 8월 1일 워커장군의 낙동강 방어선 철수명령에 따를 수 있었다.

c미 지상군도 전차를 동반한 북한군의 조직적인 보전(步戰) 공격, 피난민의 전선 돌파 이용, 편의대(便衣隊)의 침투식 공격 등 다양한 공세에 고전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극복해 나갔다. 미군은 7월 5일 스미스 부대의 오산전투를 필두로, 제24사단의 대전전투, 제1기병사단과 제25사단의 영동-황간전투, 제24사단의 진주-하동전투 등 성공적인 방어전투를 통해 낙동강 방어선 형성에 기여하였다.
이와 같이 개전 이후 1주일만에 전개된 7월 전투는 공자인 북한이나 방자인 국군 모두에게 중요하였다. 북한은 승리의 템포를 이용, 전쟁을 조기에 종결시키려 하였고, 한미연합군은 이 위기를 최대한 빨리 수습, 반격의 발판이 될 ''부산교두보 확보''에 매진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1950년 7월 전황은 한국전쟁 37개월 중 가장 중요한 시기였던 것이다. 따라서 1950년 7월 ''지연전''은 차후 반격작전에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한미관계의 핵(核)인 한미군사동맹의 기초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그 전투사적(戰鬪史的) 의의를 찾을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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