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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7.20 19:4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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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제목 : 낙동강전선에서의 반격작전과 의의 (국방일보)



제목 : 낙동강전선에서의 반격작전과 의의

저자 : 전쟁사부 선임연구원 양영조

수록 : 국방일보, 2002.09.26


1950년 9월 중순 유엔 지상군은 대구로부터 마산까지, 국군은 대구로부터 포항의 형산강까지 북한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유엔군은 미 제1군단이 미 제1기병사단, 국군 제1사단, 미 제24사단으로 대구를 방어하고 있었고 그 남쪽으로는 미 제2사단이 창녕-영산에서, 미 제25사단은 마산에서 적을 방어하고 있었으며 국군은 제2군단이 제6사단과 제8사단으로 신령-영천에서 국군 제1군단은 제3사단과 수도사단이 안강-형산강에서 방어하고 있었다.

제8군은 미 제10군단의 인천상륙작전과 협조된 낙동강 방어선에서의 반격계획을 동년 9월 6일 완성하여 도쿄의 유엔군 총사령부 승인을 얻었으며 그후 그 계획을 일부 수정하여 작전명령으로 하달하였다. 이 반격계획은 현 접촉선인 낙동강선을 공격개시선으로 하여 인천상륙 하루 뒤인 9월 16일 09:00에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는 것이었다. 반격개시 일자를 하루 늦게 잡은 것은 인천상륙의 소식에 의해 적의 사기가 저하될 것이며 반대로 아군의 사기는 고양될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낙동강에서의 역사적인 반격작전은 계획대로 1950년 9월 16일 09:00시에 시작되었다. 가까스로 대구를 방어한 미 제1군단은 이제 역으로 적의 방어선을 돌파 후 군의 주공으로서 왜관-김천-대전-수원으로 진격하여 인천 상륙부대와 연결을 시도하였다. 이때 군단은 미 제1기병사단이 대구북방 12Km지역에서 적 제3, 제13사단에, 국군 제1사단이 가산성-팔공산에서 적 제1사단 및 제13사단 일부에 반격을 가하였다.

왜관 남쪽 낙동강 서남부지역에서의 반격작전은 미제2사단과 미제 25사단에 의해 전개되었다. 이 양개 사단의 돌파작전은 제8군의 직접지휘하에 사단별로 수행되었고, 동부전선의 국군 제1군단은 안강 남쪽에는 수도사단이, 포항 남쪽에는 제3사단이 적 12사단과 제5사단의 공격을 저지하고 반격으로 이전하였다.

중동부지역의 국군 제2군단은 제6사단이 신령에서, 제8사단이 영천에서 적 제8사단과 제15사단의 공격을 저지하고 반격에 나섰다. 군단은 육본작명에 따라 반격으로 이전하여 정면의 적을 돌파하고 제1단계 작전 목표로 함창-예천-안동을 연하는 선을 각각 성공적으로 점령하였다.

이리하여 국군과 유엔군은 반격잔전을 개시한 지 1주일만에 북한군의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였다. 북한군 전선사령부는 최초 인천상륙에도 불구하고 대구 또는 부산점령이라는 망상을 단념하지 못한 듯 낙동강전선에서 강력한 저항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9월 21일 인천상륙 소식이 전 전선에 전파되자 공산군의 진지는 급속히 붕괴되었다. 이에 김일성은 새로운 전선 형성 구상도 단념하고 9월 23일 전선사령부로 전 부대의 북으로의 후퇴명령을 하달하였다.

제8군사령관은 9월 22일 상황보고와 포로진술에 의해 적의 전선이 붕괴되고 있음을 간파하고 전선의 돌파에 이어 전 전선에서의 ''추격명령''을 하달하였다. 이에 유엔군과 국군은 수도 서울을 탈환하고 9월말까지 38도선 이내의 모든 북한군을 구축하고 사실상 전쟁 이전의 현상을 회복하는데 성공하였다.
1950년 9월 15일부터 2주간의 전격적인 작전으로 인하여 북한 정권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전쟁을 더 지속할 능력마저 상실하였다. 북한군 전선사령관과 참모는 김천에서 철의 삼각지대로 도주하였고, 제1군단 사령부는 조치원에서 해체되어 지휘관과 일부 참모가 태백산맥으로 잠입하였고, 제2군단사령부는 김화로 이동하였다. 또한 각 사단도 조직이 와해되어 분산 후퇴하였다.

전선에 투입된 적의 부대 중 상당수가 아군의 포위망을 탈출하여 38도선 이북으로 도주하였고, 나머지 생존자는 지리산, 태백산 등지로 은신하였다. 북한군은 기동로의 차단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연료의 고갈로 거의 모든 기동장비를 포기하고 도피하였으며, 이는 개전 초기 북한군의 기습에 의해 국군이 입은 피해보다 더 심각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유엔군의 승리는 전쟁지도부의 완벽한 상황판단과 작전계획의 수립, 절대적으로 우세한 제공권과 제해권의 장악, 지상전에 있어서의 미군의 우수한 기동력 등 여려 요소의 결합에 의한 것이었다.

또한 작전에서의 성공요인 중에서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은 역시 국군의 신속한 기동이었다. 당시 국군은 동부전선을 맡아 태백산맥의 준령과 그 지맥으로 인하여 기동로가 극히 제한되었을 뿐만 아니라 기동장비도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밤낮으로 적을 추격하여 기습을 달성하고 적의 퇴로를 차단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국군은 기동장비를 보유한 유엔군보다 먼저 38도선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초기 패전의식에서 벗어나 승리할 수 있다는 확고한 자신감을 가지고 전투에 임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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