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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7.20 19:5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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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제목 : 국군의 발자취와 미래 (국방소식)



제목 : 국군의 발자취와 미래 (특별기획 - 건군54주년 국군의 날)

저자 : 국방사부 선임연구원 백기인

수록 : 국방소식, VOL143호 (2002년-10호)


지난 세기 국군의 발전은 민족사상 초유의 강군(强軍)을 건설한 대역정이었다. 건군 당시 ''청년국군''이라고 불리우던 우리 군은 이제 54주년의 연륜을 지닌 ''장년국군(壯年國軍)''이 되었다. ''국군의 날''에 즈음하여 우리 군이 태동하던 건군기로부터 오늘 21세기 신국방기에 이르기까지 국군의 발자취를 돌아보면서 앞으로 나아갈 바를 새롭게 다짐해보는 것은 매우 뜻깊은 일이라 하겠다.

건군의 정신과 역사의식

통상 역사가들은 과거의 사실에 생명력을 불어넣을 뿐만 아니라 잃어버린 문화와 정신을 소생시키는 원동력이 역사의식이라고 말해왔다. 일제하에서 민족사학자 신채호(申采浩)가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와의 투쟁''이라 하면서 역사 주체인 한민족의 능동적인 역사의식을 일깨우고자 했던 것도 그러한 까닭이다. 그 같은 역사의식이 강하게 투영된 역사가 바로 국군의 건설과정인 건군사(建軍史)인 것이다.
건군사를 통해 보면 뼈아픈 역사의 교훈을 바탕으로 하여 국가보루로서의 정예군대를 건설하기 위해 민족적 역량이 총결집되었음을 보게 된다. 그것이 곧 의병(義兵), 독립군(獨立軍), 광복군(光復軍)을 이어 민족사의 정통성을 계승한 국군의 창설과정이었다. 정부 인사는 물론 군사지도자들은 과거의 군사경험을 되살려 불굴의 투지와 인내로 미 군정당국을 설득하고 건군의 열기를 한 데 모아 국군의 전신인 조선경비대(朝鮮警備隊)를 창설하였다. 그러한 노력으로 국군은 1948년 정부 수립 당시 5만명에 이르렀고, 6·25전쟁 직전에는 근 10만명에 육박하는 전도양양한 군대가 되었다. 광복군 출신의 이범석 초대 국방부장관은「국방부훈령 제1호」를 통해 ''자주독립과 진충보국''의 정신을 역설했는데, 이는 민족 고래의 상무정신과 애국사상에 기반을 둔 건군이념의 표방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국군은 6·25전쟁의 혹독한 시련을 치러야만 했다. 소련의 특별지원을 받아 자행된 북한의 기습남침을 맞은 군은 당시 ''연합국방''의 정책적 기조 하에서 자유우방과 연대하면서 풍전등화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신생 대한민국의 열악한 여건에서 육탄으로 조국강토를 지켜낸 것이나 다름없다. 국군은 전쟁 시 총력전의 핵심주체로서 민·관과 더불어 국난극복의 선두에서 결코 주저함이 없었다.


국군의 도전과 성취

전쟁의 시련은 혹독했지만 국군에게는 새 출발의 계기가 되었다. 전후 한·미간의 결속은 ''혈맹''의 토대 위에서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고 연합방위체제를 형성시켰다. 미군은 자유진영의 전초기지를 사수한다는 결연한 의지로 전쟁을 치렀고, 전후에는 세계적인 냉전 하에서 정전 당사국으로서 국군의 전력증강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한 뒷받침에 힘입어 국군은 1954년 20개 사단 40만명, 1958년경에 60만명 수준을 유지하며 양·질적으로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힘겨웠던 전쟁은 한·미간에 깊은 우정과 연대감을 심어주면서 동반자적 우호관계의 터전을 마련했던 것이다.

전쟁 후 한·미관계는 1960년대 중반에 베트남 파병을 계기로 다시 한번 크게 진전되었다. 국가적인 경제성장은 물론 실전경험에 의한 국군의 전력 향상이 파병의 성과였다는 점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국군의 베트남 파병은 국제군으로서 국군의 위상을 정립시킨 시금석으로서 오늘날 PKO 파병의 효시였다.
그러나 그 무렵 닉슨 독트린에 의한 ''월남전의 월남화''와 세계적인 데탕트 무드로 인해 국군은 자주국방(自主國防)을 실현해야 하는 커다란 과제를 부여받았다. 결과적으로 1970년대에 이룩한 군현대화와 전력증강은 오늘 우리 군의 기틀이 되었다. 당시 주한미군의 철수로 시작된 상황의 변화는 한편으로 위기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회였다. 1949년 6월 30일 주한 미군의 철수로 1년 뒤에 전쟁이 발발했던 것을 상기시키듯, 1970년대초 미제7사단의 철수로 시작된 미군철수 문제는 한반도에 급격한 전력 불균형을 초래하리라는 우려로 다가왔다.

이에 우리 군은 대미관계에서 인내를 가지고 지속적인 협상을 통해 끝내 미국의 철군정책에 수정을 가하는 한편, 한 걸음 더 나아가 한반도의 긴장과 위기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확고한 한·미 연합방위체제를 출범시키는 전기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군·관·민이 혼연일체가 되어 총력안보태세를 유지하고, 선조들의 유비무환의 정신을 계승하여 ''율곡사업(栗谷事業)''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M-16 개인화기를 비롯해 전차(M48A3∼5)와 헬기(500MD)의 양산과 유도탄(백곰) 개발 등으로 자주국방의 기초를 닦는 성과를 거두었다. 국군의 전력증강은 1980년대에는 제2차 율곡사업(''82∼''86년)을 통해 한국형 전차인 K-1전차를 비롯하여 토우 대전차유도탄, 한국형 구축함 등을 자체 생산하고 실전배치하여 무기체계의 국산화에 성공하는 단계에까지 도달하였다.

이러한 유형전력 외에도 우리 군은 무형전력인 정신전력을 강화하여 사기충천한 사상군대로서의 면모도 일신하였다. 전투력의 원천이 전사의 전투의지에 기초한다는 확신 속에서 국군은 무형전력을 개발하여 전투력의 극대화에 진력했을 뿐만 아니라 건전한 병영문화 정착에도 심혈을 기울여 군대가정화를 조성하는 데 열과 성을 다하였다. 그러한 인간 중심의 병영건설은 다른 한편으로 첨단정보체계의 구축과 같은 고도의 전자정보화 추진과 병행되었다. 그리하여 국군은 현대전의 특징인 조기대응능력을 확보하기 위한 정보수집체계를 구축하고 최첨단의 조기경보체제를 실현하는 한편, 미래전장환경에 대비하여 전자정보전을 수행하기 위한 C4ISR과 같은 체계통합전 능력을 제고하는 국방정보화체계를 전망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1990년대초 걸프전 이후에는 지역분쟁이나 대테러전의 국제적 연대에 동참하는 가운데 세계 평화의 조정 관리자로서 국제군의 역할도 수행해왔다. 그러한 역할이 커질수록 국방·군사외교 또한 강화되었는데, 이제 우리 군은 주변국과의 군사교류 및 협력의 다변화는 물론, 긴밀한 군사외교 채널을 통해 국제군비통제 활동에 참여하는 다자안보협력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장년국군''의 미래와 전망

우리 군이 건군 초창기 신생군대로부터 지금의 장년국군으로 성장하여 명실상부한 국제군으로 발돋움하기까지는 빛나는 선배 전우들의 공로가 밑바탕이 되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건군의 맥박은 국군의 역사와 더불어 면면히 계승되어갈 것이다. 오늘 우리 국군의 모습은 과거 유산의 열매다. 지난날 민족사의 단절을 극복하고 민족정기를 회복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국군의 발자취를 더듬어 건군의 정신과 역사의식을 재음미해야 함은 참으로 마땅한 일이다.

"의식은 국제적으로, 행동은 민족적으로!", 이것이 지난 국군의 발자취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역사적 교훈이다. 이 교훈은 우리 군의 현재적 명제이자 지난 54년 전 민족의 역사와 정기를 회복시킨 ''건군정신''을 오늘에 되살려 ''제2의 건군''의 좌표로서 민족의 무궁한 안녕을 보장하는 민족군대로서의 21세기 국군의 시대적 사명을 새롭게 일깨워준다고 하겠다.

우리 국군에게 부여된 역사적 사명이란 ''국군의 날''의 의미와 정신이 말해주듯이 상무정신(尙武精神)과 국민통합의 구심체로서 평화통일을 달성하는 것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1956년 국무회의에서 제정된 ''국군의 날''은 6·25전쟁 시 전란의 벼랑 끝에서 국군이 반격을 개시하여 최초로 38선을 돌파한 승전일을 계기로 한 것이었다. 무릇 기념하는 것의 실체가 정신이라면, ''국군의 날''의 정신은 국군의 기상과 진취성, 상무정신, 3군의 통합의식, 나아가 국민과 함께하는 민·군 일체의 총화사상(總和思想)을 함축하고 있다 할 것이다. 국군의 38선 돌파의 최종적인 목표가 통일이었다는 점에서 오늘의 국군 역시 민족의 숙원인 평화통일의 역사적 사명을 다시 한번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의식과 더불어 오늘 우리 국군에게는 21세기의 전환기적 안보환경을 냉철하게 인식하면서 군 본연의 임무를 완수하는 현실인식이 요청된다. 군의 존재 목적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 있는 만큼 국방의 요체는 ''강군육성(强軍育成)''이 그 귀결점이다. 따라서 남북관계의 현실적 변화를 직시하면서도 미래전장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대비태세를 갖추는 데 조금도 소홀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확고한 국방태세를 보장하기 위해서 한·미 연합방위체제가 현실적으로 매우 중요하다는 점은 말할 나위가 없다. 주한미군은 국군과 함께 연합전력의 핵심으로서 위기관리의 적극적인 협력자이다. 최근의 6·29서해교전 때 침몰한 해군고속정 참수리357호의 인양작전에서는 연합위기관리체제를 가동하여 증가된 정보 및 감시태세를 유지한 가운데 완벽한 선체수색과 인양작업을 전개함으로써 양국의 군사적 공조의 효과성을 잘 보여주었다. 피로 맺어진 우방에서 시작된 한미동맹은 21세기 핵심적 동반자로서 한반도 평화의 초석이 되고 있다 할 것이다.

또한, 국내총생산(GDP) 대비 3%대의 국방비를 유지하면서 최소한 10∼20년을 내다보는 미래지향적인 국방력 건설을 위한 국민적 지원이 계속되어야 한다. 선인들은 "병은 백년을 쓰지 않더라도 하루라도 준비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했으니, 유비무환을 당부한 조상들의 유지를 잊어서는 안되겠다. 국민적인 지지와 관심 속에서 21세기형의 총체적인 국방역량을 육성하는 일은 미래의 국가 생존권을 수호하는 투자이며, 국민의 안정된 생활을 보장하는 안전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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