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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7.20 19:5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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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국군발전사의 회고와 교훈 (국방일보)



제목 : 국군발전사의 회고와 교훈

저자 : 국방사부 선임연구원 김종숙

수록 : 국방일보, 2002.10.15


무릇 우리 인간사회에서 탄생의 의미는 성스러움을 갖고 있다. 국군의 탄생 또한 국가보위의 성스러운 소명을 받아 조국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것이다. 우리 국군은 신생국의 어려운 여건에서 태어난지 올해로 54돐을 맞아 어느덧 장년국군으로 성장하였다. 과거의 역사적 경험은 현재와 미래의 거울이라고 말한다. 건군 54주년을 맞아 국군의 발전사를 회고해보고, 우리 국군의 발전과정에서 나타난 변화의 특징과 교훈을 제시하고자 한다.

정부수립 후 발표된 국방부 훈령 제1호(1948. 8. 16)에는 "금일로부터 육·해군 각급 장병은 대한민국의 국방군으로 편성되는 영예를 안게 되었다"라고 그날의 감격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출범 당시 국군의 병력과 장비는 너무도 열악했다. 육군 병력은 8개 연대와 1개 독립연대에 불과했고, 해군은 소(小)해정 몇 척에 불과했으며, 일년 후 독립한 공군 역시 L-19 몇 대에 불과했다. 이처럼 신생국의 국군은 어려운 여건에서 태어난 것이다. 당시 우리 국군은 내부적인 이념 갈등과 냉전초기 국제환경의 격랑속에서 체제를 보위하고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견지하기 위하여 대대적인 숙군(肅軍)을 단행함으로써 사상적 동요를 막을 수 있었다.

이어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발발한 6·25전쟁은 민족의 참화요 엄청난 재앙이었다. 우리 군은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속에서 육탄으로 맞서 싸웠고, 자유우방과 연대하여 국가적 위기를 슬기롭게 대처했던 것이다. 반만년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격렬하고 참혹했던 이 전쟁은 총 300만명의 사상자를 내고도 승자 없는 전쟁으로 끝났다. 전쟁이라는 값진 교훈을 통해 미국은 한반도의 중요성을 재평가하였고, 양국은 혈맹관계의 토대위에서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연합방위체제를 굳건히 하였으며, 한국군현대화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1960년대는 북한의 군사도발로 남북간에 첨예한 대립상태가 계속되면서 국가안보에 영향을 미칠 중대한 사건이 연속적으로 발생한 격동기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월남파병은 우리의 입지를 높힐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고, 한국이 세계로 진출하는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 파병의 대가로 미국의 무기와 장비를 지원 받게되어 우리 군은 또 한번 도약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주한미군 철수와 월남파병을 계기로 싹트기 시작한 자주국방에 대한 집념은 북한의 도발이 격렬해지면서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1·21 청와대 습격사건 이후 박정희 대통령은 "250만명의 향토예비군을 무장시키고, 연말까지 무기공장을 건설하겠다"는 자주국방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천명하였다.

이후 1970년대 초부터 닉슨독트린 선언과 미·소의 데탕트에 이어 미·중의 화해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주한미군의 철수와 대한군사원조의 중단 그리고 주월한국군 철수 등이 한·미간의 현안으로 부각되었고, 자주국방은 국방정책의 기본목표가 되었다. 이를 위해 국군은 1972년 말 최초로 국방목표를 설정하여 국방정책과 군사전략의 수립방향을 명문화하고 자주국방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된다. 우리 국군은 한국군현대화계획(''71∼''75)과 1차 율곡계획(''74∼''81)을 적극 추진함으로써 육·해·공군의 전력증강이 획기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이러한 자주국방의 토대위에서 한·미간의 연합방위체제도 확고하게 확립되었다. 닉슨독트린에 의한 주한미군의 철수에 대한 보완책으로 1971년에는 한·미 제1군단사령부가 창설되었고, 미 제2사단 방어지역을 국군 제1사단이 인수함으로써 휴전 이후 최초로 한국군이 전 휴전선을 담당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1974년 유엔총회에서 유엔군사령부의 해임안이 거론되고, 1977년에는 카터 행정부가 주한미군의 철수를 단행하게 된다. 이에 따라 한·미 연합군사령부가 창설됨으로써 굳건한 연합방위체제가 구축된 것이다.

국력의 신장과 함께 국군은 혁신적인 발전을 이룩하게 된다. 우리 국군은 1980년대가 자주국방을 위한 제2차 율곡계획을 성공적으로 추진하여 ''88한국형 전차(K-1), 토우 대전차 미사일, 155미리 자주포·다연장 로켓, 한국형 구축함 등을 개발하여 실전 배치하면서 전력을 획기적으로 증강하였고, 1990년대 들어서는 우세한 국력을 바탕으로 국군은 한국적 전략 및 전술을 발전시키고, 고도의 전비태세로 전쟁억제력을 발휘 할 수 있는 군사전략 개념을 새롭게 정립한 것이다. 또한 통합전력을 극대화 할 수 있도록 군구조 및 방위력 개선, 국방정보화, 무기체계연구개발 등을 중점적으로 추진해 왔다. 특히 걸프전 이후 국제평화유지군으로 소말리아, 동티모르 등 6개국에 연인원 2,300명을 파견하였고, 현재도 동티모르를 비롯한 4개 분쟁지역에서 평화유지활동을 전개하여 국군의 위상을 높이면서 국제군으로서의 면모를 과시하고 있다.

건군 54개 성상의 역사가 말해주는 큰 특징은 무엇보다 전쟁수행능력의 측면에서 6·25전쟁 당시의 재래전 형태로부터 오늘날 지휘통제체제(C4I)를 골간으로 하는 첨단의 정보·기술군에 의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와 함께 종래 고지쟁탈전과 같은 전통적인 재래전에 치중하던 작전형태에서 한·미 연합전력과 육·해·공군을 통합하는 입체전으로 발전되어 고도의 전투력을 발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한·미 연합방위체제는 한반도의 평화에 절대적인 역할을 해왔고, 이러한 안보체제하에서 우리 군이 자주적 역량을 크게 향상시킨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시사하고 있다.
군사외교적으로는 대미 일변도의 제한된 군사교류 협력 차원에서 주변국 중심의 다자간 안보협력을 바탕으로 한 다각적인 군사외교로 전환했으며, 걸프전 이후에는 국제평화유지군으로서 활동을 전개하여 명실상부한 지역군에서 국제군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또한, 우리 군의 국방정책 수립 및 집행에 있어 장족의 변화를 거듭해왔다. 건군 이후 ''60년대까지 1년 단위의 ''시책''을 시행해왔으나, ''70년대를 거쳐 국방목표를 설정하고 5년∼10년 단위의 국방중·장기정책을 수립했는가 하면 현재는 국가전략적 수준에서 국방정책기획서를 입안하는 단계에까지 발전된 것이다.

건군 54년의 발자취는 우리에게 몇 가지의 교훈을 제시하고 있다. 군 내부적으로 보면, 6·25전쟁과 월남전쟁을 통해 쌓은 선배들의 풍부한 실전경험과 전투감각은 우리 군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소중한 유산이다. 또한 군을 육성·발전시킨 군 통수권자를 비롯한 군사지도자들의 거시적인 안목과 의지는 발전의 원동력이었다. 창군계획이나 율곡사업 추진과정, 그리고 최근의 미래전에 대비한 군사혁신 등이 이를 잘 입증해 주고 있다. 향후 군의 무궁한 발전을 위해서 선배 참전원로와 군사지도자들의 역사적인 전투경험과 훌륭한 지도력은 군사사 연구를 통해 보다 체계적인 방법으로 후배들에게 계승 발전되어야 할 것이다.

군 외적인 요소로는 군에 대한 국민적 지지와 신뢰가 군 발전에 필수적인 요건인 것이다. 6·25전쟁시 국군의 38선 돌파에서 보여준 군의 진취적 기상은 민족사 고래의 상무정신과 민족적 자신감을 회복시켜 통일을 향한 우리 민족의 저력으로 승화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국민적 지지와 신뢰를 바탕으로 우리 국군은 어려운 시련과 위기를 극복하고 국가발전에 기여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또한 전시 민·관·군의 총화단결의 정신은 국가안보의 핵심 요소라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6·25전쟁 당시 각계 각층이 총화단결하여 전란의 위기을 슬기롭게 극복하였고, 전후에도 국가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한 사실은 국민총화 정신의 중요성을 보여준 것이다.

이제 우리 군은 다시 한번 군의 성스러운 사명을 자각하고, 대북우위의 군사력을 확보하여 한반도에서 전쟁억제를 위한 지속적인 노력이 절실히 요구된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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