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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7.20 20: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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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제목 : 중공군 3차공세와 1·4후퇴, 그리고 원주 (국방저널)



제목 :
중공군 3차공세와 1·4후퇴, 그리고 원주

저자 : 전쟁사부 선임연구원 최용호

수록 : 국방저널,''이달의 전투사'', 2003.01월호


1950년 10월 19일, 압록강을 건너 한국전쟁에 개입한 중공군은 두 차례의 공세를 통해 파죽지세(破竹之勢)로 진격을 계속하고 있던 국군과 유엔군을 기습, 격파했다. 그리고 12월 4일 평양을 점령한 후 남진을 계속하여 12월 중순에는 38선까지 진출함으로써, 북한군이 잃었던 38선 북쪽의 영토를 대부분 회복했다.

중공군의 기세가 이렇게 등등해 지자,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이 38선에서 멈춰주기만을 고대(苦待)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엔군의 바램은 무참히 깨졌다. 12월 31일, 중공군의 3차공세가 시작된 것이다. 서부전선의 유엔군은 1월 4일, 또 다시 서울을 떠나 후퇴를 거듭했다. 이렇게 평택-안성을 연하는 37도선까지 철수한 유엔군은 겨우 중공군과 접촉을 단절하고, 전열을 수습할 수 있었다
. 그런데 위기(危機)는 생각지도 않던 곳에서 발생했다. 중부지역에서 홍천-원주를 향해 남하한 북한군이 원주를 점령한 후에도 집요한 공격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이들이 충주-대전방향까지 진출하여 유엔군 후방을 차단한다면, 어떻게 될까?"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았다.

▲ 공산측, 조·중 연합사령부 창설과 38선 돌파

12월 중순, 38선 일대에서 유엔군과 대치하게된 중국 지원군(志願軍)사령원 펑더화이(彭德懷)는 중공군과 북한군을 통합지휘할 연합사령부 설치에 착수했다. 당시 북한군은 주력이 붕괴되어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따라서 조·중 연합사령부가 창설될 경우 북한군은 작전지휘권을 펑(彭)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김일성으로는 달가울 리 없었기 때문에 연합사령부 구성은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그러자 마오쩌둥(毛澤東)과 스탈린이 나서 펑(彭)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조·중 연합사령부가 창설되었으며, 북한군은 펑(彭)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이어서 펑(彭)은 38선을 돌파하여 서울을 점령하는 3차공세를 구상했다. 그러나 당시 중공군은 1·2차 공세로 인한 부대정비의 필요성과 증원부대(제19병단)의 도착, 그리고 2차공세시 장진호 전투에서 붕괴된 제9병단의 부대정비, 필요한 보급품 획득 등을 고려해, "1951년 2∼3월경에 38선을 돌파, 서울을 점령한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그러나 마오(毛)의 판단은 달랐다. 펑(彭)이 건의한 "2∼3개월간의 공세준비 기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중공군이 정지할 경우, 38선이 고착화된다"는 정치적 문제를 고려해 "지체 없이 38선을 돌파, 서울을 점령한 후, 부대정비 기간을 부여한다"며, 즉각 공세를 명령했다.
이 같은 마오(毛)의 지침에 따라 펑(彭)은 공세 준비에 착수했다. 대대적인 병력보충과 함께 후방보급 및 수송체계가 개편되었으며, 현지조달 보급으로 필요한 식량도 확보했다. 그리고 12월 31일을 공격개시일로 선정하여 전 전선에서 공세를 감행했다.

이때 중공군의 기동계획은 전쟁초기 북한군의 기동계획과 비슷했다. 즉 주공(主攻)을 5개군단(중공 4. 북한 1)으로 편성, 서울 북방에서 서울을 목표로 공격하고, 2개의 조공(助攻)을 편성하여 가평-서울 동측 방향으로 중공군 2개군단이, 홍천-원주 방향으로 북한군 2개군단이 각각 공격하는 등 총 9개군단을 투입했다.

▲ 중공군의 서울 점령과 1·4후퇴

1950년 마지막날인 12월 31일은 일요일이었다. 유난히도 춥고 어둠이 일찍 찾아든 17시경, 서부전선에 배치된 중공군과 북한군은 짧은 공격준비사격과 함께 임진강을 도하해 일제히 공격을 감행했다. 또한 연천에서 피란민(避亂民)을 앞세워 지뢰지대를 개척한 후 압도적으로 우세한 병력을 투입함으로서, 서부전선의 계곡과 능선에는 중공군의 물결이 넘치게 되었다.

약 한시간 정도가 지났을 때 국군과 유엔군 방어진지의 전방은 물론, 후방에서도 중공군의 징소리, 나팔 및 피리소리가 울려 퍼지고, 전후방에서 일제히 수류탄이 날아들었다. 이때 중공군들은 문산 우측의 제1사단과 동두천의 제6사단 등 국군부대를 집중 공격하고 있었다. 제1·6사단은 준비된 진지에서 용전분투 했으나, 시간이 갈수록 거세지는 중공군 인해전술(人海戰術)을 감당할 수 없었다.

1951년 1월 1일 오전, 전투현장을 시찰한 미 제8군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은 국군 제1·6사단의 돌파구가 예상외로 심각하고, 중동부 전선의 국군 제3군단도 집중적인 공격을 받고있어 "적에게 포위될 위험이 크다"라고 판단했다. 결국 장군은 1월 1일 12시경, 전 부대를 한강-양평-홍천선으로 철수하도록 했다. 이어서 1월 3일 오후에는 한강선에서 평택-안성선으로 철수를 명령했다. 이때 장군이 한강선의 결전을 포기한 것은 한강이 결빙되어 장애물로써 가치가 반감되었기 때문이었다.

8군사령관의 철수명령에 따라 1월 4일 오전까지 한강이북의 모든 부대들이 한강에 설치된 임시교량을 이용하여 질서 있게 철수했다. 그리고 13시경 마지막 엄호부대가 철수했다. 이어서 14시경, 8군의 한강 교량통제반이 임시교량을 폭파했다. 그리고 15시경, 중공군이 서울에 입성하였으며, 서울시청에는 인공기(人共旗)가 걸렸다.

한강선에서 철수한 국군과 유엔군은 수원과 오산을 지나 단숨에 37도선까지 후퇴해 1월 6일, 평택-안성의 방어선을 점령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중공군은 보이지 않았다. 8군은 도깨비에 홀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위기는 엉뚱하게도 중부전선이었다.

▲ 집요한 공격을 계속하는 중부전선의 북한군

서부 전선의 부대들이 중공군에 밀려 평택-안성까지 후퇴하는 동안, 중부전선의 가평-춘천 지역에서는 중공군 2개군(군단)이 국군 제2·5사단 지역을 돌파한 후 서부전선과 연결을 시도해 위기가 조성되었다. 그러나 중공군의 공격은 1월 8일을 전후해 일제히 멈추었다.
반면 국군 제8사단과 3사단이 배치된 홍천-원주 방향에서는 12월 중순, 대규모의 북한군이 태백산맥의 험준한 지형을 따라 아군 후방으로 침투해 기존의 유격대와 합류했다. 이들이 정면에서 공격하는 북한군 2개군단과 전후방 동시 공격으로 방어중인 국군 부대들을 격파했다. 이어서 이들은 원주-평창과 영월-단양 일대까지 진출하여 8군의 후방 병참선을 위협하는 최대의 위기가 조성됐다.

당시 미 제10군단은 대구 및 부산 등에서 부대를 정비하고 있었는데, 중부전선의 위기는 이들을 그냥 두지 않았다. 8군사령관은 1월 3일, 제10군단(제2·7사단)에 국군 제3군단(3개사단)을 배속하면서 "중부전선의 위기를 수습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따라 핵심지역으로 부각된 원주는 미 제2사단이 방어하게 됐다.

▲ 3차공세의 승부처가 된 원주 쟁탈전

1951년 1월 초, 8군의 최대 관건은 원주를 지키는 것이었다. 물론 서울을 빼앗긴 서부지역도 위기였다. 그러나 "서울은 빼앗긴 것이 아니라 내주었다"라는 표현이 적절했다. 또한 평택-안성까지 철수한 서부의 유엔군 주력은 일단 중공군과 접촉을 단절하고, 부대를 수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원주의 북한군 2개군단은 중공군과 달리 공격을 계속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이 원주의 견부(肩部)를 격파하고, 청주-대전방향으로 진출한다면, 평택-안성의 유엔군 주력은 후방이 차단될 우려가 있었다. 따라서 서울을 내어준 1월 4일 이후부터는 원주가 8군의 최대 관심지역으로 부각됐다.

한편 원주를 공격하는 북한군 제5군단은 피란민으로 위장했던 부대를 원주 정면에 투입하고, 원주 서측 문막에 제12사단을 투입, 방어중인 미 제2사단의 후방을 위협했다. 그러자 미 제2사단은 퇴로차단을 우려해 1월 7일 밤, 원주 남쪽 목계 방향으로 철수했다. 그러나 원주의 전략적 가치를 잘 알고 있는 군단장의 명령으로 1월 8일 아침, 항공기의 근접지원과 함께 역습을 감행했다. 그리고 격렬한 공방전 끝에 1월 11일 오후, 원주 직후방의 247고지를 확보했다.

이 같은 4일간의 전투에서 북한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울러 중공군이 공세를 중지한 상황에서 북한군의 단독 공격은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결국 원주에서 미 제2사단의 선전(善戰)으로 8군은 위기를 수습하고, 차기반격을 위한 발판을 확보한 것이다. 특히 제2사단은 군우리에서 당한 패배의 앙금을 털어 버리고, 새롭게 나서게 되었다.

▲ 3차공세 의의와 교훈

중공군은 3차공세시 마오쩌둥의 ''서울점령''지침에 따라 작전목표를 유엔군 주력 격멸 보다는 서울이라는 지역목표에 지향했다. 이 결과 중공군은 서울을 점령할 수 있었다. 반면 국군과 유엔군은 주력(主力)을 보존하여 후일을 기약할 수 있게 됐다.

이때 만약 중공군이 "유엔군 주력을 격멸한다"는 목표를 수립하고, 제9병단, 또는 제19병단이 증원하여 원주방향으로 투입하거나, 서울에 지향된 주력의 일부를 원주에 투입했다면, 상황은 수습할 수 없는 국면으로 치달았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러나 중공군이 3공세를 미쳐 준비되지 못한 상태에서 감행함으로써, 예비인 제9병단은 장진호의 피해를 복구하지 못했고, 제19병단은 본국에서 출발하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공세에 참가한 병력들은 서울 점령을 최대의 목표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원주의 호기를 활용하지 못했다. 8군의 입장에서는 간발의 차이로 위기를 수습하는 순간이었다.

지휘관은 물러설 때와 나서야 할 때를 정확히 읽고, 필요한 행동을 취하는 것이 중요하다. 매사가 그렇겠으나, 특히 군사작전은 지휘관의 판단에 따라 승패가 결정되며, 부하의 생사가 좌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기와 호기를 판단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갈고 닦아 승부사의 기질을 갖춘 지휘관만이 이 같은 상황을 읽어 낼 수 있다.

공세 종말점, 즉 사지(死地)을 향하는 상황이 최종 승리를 쟁취할 수 있는 결정적인 호기로 보이기도 한다. 낙동강 방어선을 공격하는 김일성과 북진작전시 한만(韓滿) 국경선을 향해 총 진군을 명령한 맥아더의 경우가 그랬었다. 반면 소극적 공세로 결정적인 호기를 놓치는 경우도 있었다. 필자는 "3차공세시 펑더화이의 경우가 그렇지 않았을 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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